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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희곡 1
· 저   자 : 이반세르게예비치투르게네프 외 · 출판일 : 19980330
· 출판사 : 열린책들 · 공급일 : 20181031
· 공급사 : (주)OPMS · 용   량 : 304.00 KB
· 모바일 : 지원가능 · E A N  : B5550306024000
· 유   형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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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러시아 희곡사의 흐름을 이끌어온 아홉 작가의 희곡 아홉 편을 담았다. 포비진의 「미성년」,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 푸쉬킨의 「보리스 고두노프」,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러시아 희곡은 서구 희곡과 대치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작품집은 주옥같은 러시아 희곡 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희곡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 싶다.
저자소개
이반세르게예비치투르게네프 : (Ivan S. Turgenev) (1818~1883)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부유한 상류 지주 계급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과 성 페테르부르그 대학을 다녔으며,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처음에 그의 초기작품 중에 하나인 '스포츠맨의 스케치(Sportsman's Sketches)'가 극찬을 받는 성공을 거둘 때까지 그는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다. 스포츠맨의 스케치는 러시아의 농노들의 힘겨운 삶을 묘사한 연작 소설이다. 투르게네프 는 전원 생활과 농노제도가 농노와 주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농노들은 인간이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투르게네프 는 농노들을 인간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인보다 인간성이 더 뛰어난 것으로 묘사했다. '스포츠맨의 스케치'에서 농노제도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미국에서의 해리엣 비쳐 스토우(Herriet Beecher Stowe)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 비견된다. 이것이 알렉산더 2세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그로 하여금 농노들을 해방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가 해방자라는 이름을 얻게 하긴 했지만, 농노해방령이 내리기 이전에 투르게네프 는 자신의 농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투르게네프 는 러시아의 시골과 농부들의 삶을 정확하게 묘사한 '시골에서의 한달(A Month in the Country), 코르, 칼리니치(Khor, Kalinich)를 포함하여 몇 편의 다른 소설을 썼다.


투르게네프 는 후기 작품들에서 그 시대의 다른 작가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병적인 심리연구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작가들은 '잉여인간'으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본래 건설적인 인물들인데 그 당시 사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뛰어난 지성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천박하고 시시하지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 때문에 갈등하는 대단히 지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방식의 인물분석은 1800년대 후반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와 잘 맞았기 때문에 유행했을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서방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서구화할 필요성과 슬라브족의 우월감으로 인해 옹호되고 있는 독특한 러시아문화를 지켜가려는 바램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다.
'잉여인간의 일기(The Diary of a Superfluous Man)'에서 투르게네프 는 자기자신의 정체를 살펴봄으로써 본질적으로 혼자 살고자하는 이런 특별한 인간들 중 하나를 묘사했다. 투르게네프 의 소설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작가들의 소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인물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말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내적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현실적인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표지를 통해 인물의 내적 감정을 추론해야한다.


투르게네프의 인기 있는 다른 소설 '루딘(Rudin, 1856)'에서는 잉여인간 부류의 인물을 내세워 좌절감과 여전히 그들의 무능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보다 나이든 세대에게 경이를 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온유한 사람들의 보금자리(A Nest of Gentle folk, 1860)'에서는 옛 상류계급의 이전의 정통적인 이상을 찬미하며, '이브에 대하여(On the Eve, 1860)'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영웅적인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투르게네프 의 작품들은 좌파와 우파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진실과 시와 아름다움을 잘 조화시켰다.


투르게네프는 위대한 작품들을 많이 썼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러시아 남성 영웅은 한 명도 없다. 이런 바램에 부응해서 투르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Fathers and Sons)'을 썼다. 이 소설 속의 영웅은 미천한 출신의 대학생으로 과거를 비웃고 변화의 속도가 느린 당시의 자유주의를 못 견뎌한다. 주인공은 보다 나은 미래로 도약하기를 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게네프는 종국에 가서는 혁명이 무익하다고 얘기한다. 투르게네프 의 이런 견해는 많은 러시아의 급진주의자들을 화나게 했다. 아마도 이러한 분노가 급진주의자들이 행동을 취하도록 자극하고 더 나아가 레닌의 지도아래 러시아 혁명을 이끌도록 했을 것이다. 투르게네프 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작품을 썼다. 그는 잠시 여행을 하기 위해 러시아에 돌아왔을 뿐이다. 그의 후기 소설 중의 하나인 '스모크(Smoke, 1867)'에서는 러시아의 모든 사회계층을 꼬집고 있으며, '처녀지(Virgin Soil, 1877)'에서는 1870년대의 러시아의 혁명운동을 그리고 있다. 이들 작품에 나타난 대부분의 견해는 장차 투르게네프 가 러시아 사회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투르게네프 는 그 인생의 막바지에 러시아에서는 인기가 줄어들었지만, 그 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계속 인기가 있었다. 그는 바깥세계, 즉 서유럽에 러시아의 정신을 알리고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최초의 러시아 작가이다.



1840년대에 투르게네프 는 니꼴라이 고골리의 영향을 받아 시와 비평과 단편소설을 썼다. 단편 연작소설인 '스포츠맨의 스케치(1852)'로 그는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의 견해로 말미암아 성 페테르부르그에 한달 동안 구금되고, 18개월 동안 가택연금을 당해야했다. 1855년과 1862년 사이에 투르게네프 의 소설은 예술적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 시기에 그의 가장 훌륭한 소설과 소품 몇 점이 쓰여졌다. 그의 여섯 편의 소설 중 4편은 'Rudin(1856), Dvorianskoe Gnedo(1859), Nakanue (1860), Ottsyi Deti(1862)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적대적 반응 때문에 투르게네프는 결국 1856년에 러시아를 떠나게된다. 그는 처음에 독일에서 살다가 런던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된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 정착하여, 이곳에서 1871년에서 죽을 때까지 비아르도 부부와 함께 지낸다. 1860년에 왕립 과학원의 객원이 되었고, 1879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민법학 박사가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1883년 9월 3일 파리근교 Bougival에서 죽었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소품인 '초원의 리어왕(A King Lear of the Steppes, 1870)과 '봄의 급류(Spring Torrents)'가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첫사랑(First Love, 1860)과 함께 이 장르에서 그가 쓴 최고 작품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출판된 작품은 '산문시(Poems in Prose, 1883)'란 제목의 명상과 일화를 모은 작품이다.

톨스토이 :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나 카잔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촌계몽활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군에 입대했다. 처녀작「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주로 현대인이란 잡지를 통해「소년시절」「청년시절」「카자크 사람들」등을 발표했다. 이후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 동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부활」등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또한「바보 이반」「두 노인」등 민중소설도 썼으며 종교론, 예술론, 인생론, 희곡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폰비진 : (1745.4.14~1792.12.12) 모스크바 출생. 중류 귀족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한편 예리한 비판력으로 당시의 러시아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글을 쓰며 극작(劇作)에도 힘썼다. 1709년 러시아 최초의 창작희극 《여단장(旅團長) Brigadir》을 발표하여 당시의 고전주의의 구각(舊殼)을 탈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1782년 최대의 걸작 《미성년(未成年) Nedorosl》을 써서 농노제도의 사회에서 지주들의 탐욕과 악덕, 횡포와 무법 등을 날카롭게 적발함으로써 러시아의 사실적 풍자극의 전통적 기초가 되는 전형(典型)을 구축하였다. 후에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러시아 황제의 미움을 받아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니꼴라이오스뜨로프스끼 : 오직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한 권을 낳기 위한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삶은 뜨겁고 짧았다. 1904년 우끄라이나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9년 국내전에서 15세의 나이로 적군(赤軍)에 참가하였고, 복부와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끼예프에서 전기공 보조로 일하다가 티푸스와 급성 류머티스로 마이나끄 요양소로 옮기게 되었다. 1924년 그토록 바라던 당원 자격이 주어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끝내 전신불수 및 실명이 되었다. 23살의 일이었다. 지독한 불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어떻게든 이바지하려는 소망에서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했던 격변의 시기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기록을 통해 망각으로부터 구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4년에 걸친 노고의 결실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이다. 이책은 5백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식민지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오스뜨로프스끼는 1936년 3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드로세르계예비치푸슈킨 :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유서깊은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자유주의적 교풍 속에서 1814년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선배이자 낭만주의 시인인 K.N.바튜슈코프, V.A.주코프스키 등 17.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1817년 리체이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근무하며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사상가 P.Y.차다예프와 사귀고,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그룹에 참여하는 등, 농노제 타도 정치사상이 확고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에 공명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송시 <자유>(1817),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1819)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G.G.바이런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곳에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 <도둑 형제>(1821∼22), <바흐치사라이의 샘>(1821∼23) 등의 작품 소재를 얻었다. 1820년 러시아 민간전승에서 취재한 동화풍 담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1823년 무렵에는 낭만주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집시>(1824)에서 바이런적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눈길로 개인과 사회,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면서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연금된 동안, 비극시 <보리스 고두노프>(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백작>(1825) 등을 완성하였다. 그는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하게 되고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뒤 만년까지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 니제고르드주에 갔을 때 콜레라로 발이 묶인 3개월이 창작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가 되었는데,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돌의 손님>,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질병 때의 주연(酒宴)> 등 50편의 작품을 썼으며, <예프게니 오네긴>의 기본적 부분도 이때 완성되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궁정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라는 황제에 의하여 푸슈킨은 시종보로 임명되었다. 이는 창작하는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역사적 시야를 확대해 간 그는 표트르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1833), 소설 <스페이드 여왕>(1834), 역사소설 <대위의 딸> 등을 발표했다. 1937년에 자신의 아내와 염문을 일으킨 프랑스인과의 결투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안똔체호프 : 안똔 체호프 (AHTON YexoB : 1860~1904)

러시아의 작가, 극작가, 선조는 농노, 모스크바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 러시아의 가장 암담한 시대의 전제정치에 대한 반항을 인도주의적으로 작품화하였으며 우수한 지식인들이 횡사하는 것을 본 그는, 보수 언론기관과의 관계를 끊고, 한때 심취했던 톨스토이 주의에도 비판적 태돌르 가졌다. 세기말의 침체된 기분을 반영, 환경의 중압에 짓눌린 소시민,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탁월한 중, 단편을 발표, 인간에 갛지는 폭력, 불평등의 제거를 역설, 인간성의 고귀함을 가르쳤다.

20년 간의 작가 생활 중 약 1천 편의 소설, 11편의 희곡을 썼고, 그이 극은 독자의 리얼리즘으로 무대 예술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왔으며, <6호실><우리의 생활>등의 소설과<갈매기><바냐아저씨><세자매>
<벚꽃 동산>등의 희곡을 남겼다.



고골 : 본명 고골리야노프스키. 우크라이나의 소로친치 출생. 소귀족(小貴族)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네진시(市)의 고교시절에는 자작자연(自作自演)의 연극도 해보고 회람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장래의 희망은 관리였다. 1828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급관리가 되어 신문 ·잡지에 투고하였는데, 1830년에 단편 《이반 쿠팔라의 전야(前夜)》로 각광을 받았으며, 계속하여 우크라이나의 농촌을 무대로 한 같은 종류의 단편들을 수록한 《디칸키 근교 농촌 야화 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2권, 1831∼1832)로 문단에 지반을 구축하였다.

1835년에는 역사소설 《타라스 불바 Taras Bulba》를 포함한, 우크라이나를 제재로 삼은 작품집 《미르고로트》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서는 환상성 ·서정미와 함께 풍자적 경향이 강화되어 있고, 일상생활에서의 비속(卑俗) ·권태 ·자기만족 등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마음에 도사린 악(惡)이라 하여 비판되고 있다. 같은 해인 1835년부터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중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 추악한 현실세계에 대한 증오와 삶에 패배한 ‘자그마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어, 리얼리스틱한 작품을 많이 썼다. 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네프스키 거리 Nevskii prospekt》(1835) 《광인일기(狂人日記) Zapiski sumasshedshego》(1835) 《코 Nos》(1836)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는 낭만적인 요소도 다분히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초상화 Portret》(1835, 1842년 개작)로서 그 수법은 낭만주의적 사실주의라 할 만하다. 1836년에 쓴 희곡 《검찰관 Revizor》은 관료사회의 악을 철저히 폭로했기 때문에, 찬반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을 거의 서유럽, 특히 로마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에 대작 《죽은 넋 Mrtvye dushi》의 제1부(1841)를 계속 집필하는 한편, 《검찰관》의 비판에 대한 반론(反論)인 희곡 《연극의 종연(終演)》(1842), 중편 《로마》(1842),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소재로 한 최고의 걸작 《외투 Shinel’》(1842)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농노제(農奴制)의 러시아 사회를 제재로 하여 인간의 모든 악을 풍자적으로 그린 《죽은 넋》 제1부를 집필하는 동안에, 악(惡)만을 들추어내는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고, 차차 종교적 ·신비적 정신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도덕적인 인간과 악덕(惡德)에서 갱생하는 인간을 그려 보려고 한 《죽은 넋》 제2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원고를 불살라 버렸다. 다음에는 사회의 좋은 교사가 되어 보려고 《친구와의 왕복 서간(書簡) 발췌》(1846)를 내었으나, 그 내용이 농노제를 옹호한 것이었기 때문에 벨린스키(1811∼1848)를 비롯한 많은 문학자들의 격심한 비판을 받았다.

1848년에 팔레스타인을 순례하여 약간의 정신적 안정을 얻고는 또다시 《죽은 넋》 제2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나, 끝내 도덕적인 인간을 그려낼 수 없어 완성 직전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으며, 마지막에는 착란상태에 가까운 정신으로 단식에 들어가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되며, 세부의 데포르마시옹(dformation:變形)으로 비상한 사실주의를 느끼게 하는 그의 수법은 달리 유례를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리보예도프 : (1795.1.15~1829.2.11 ) 모스크바 출생. 귀족 집안 출신으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역사 ·정치 ·경제 ·철학 ·외국어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다. 모스크바대학 재학 중에 미래의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들과 교분을 맺었다. 1812년 조국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지원해서 종군하였다.

평생을 문학에 종사하려 하였으나 근친들의 간곡한 희망으로 외교관이 되었다. 1826년에 데카브리스트의 봉기사건에 연좌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가, 페르시아 공사로 재임중 반러시아 세력이 일으킨 폭동에 희생되어 죽었다.

초기에 있었던 일련의 희극작품을 제외하면 남아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 대표작으로 희극 《지혜의 슬픔》(1822∼1824)이 있는데, 이 작품 하나로써 그는 감상주의와 낭만주의에서 탈피한 사실주의 연극의 창시자가 되었다.


레르몬또프 : (1814.10.15~1841.7.27 ) 모스크바 출생. 1828년 모스크바대학 부속 귀족학교 4학년에 입학, 실러 ·셰익스피어 ·푸슈킨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시를 짓기 시작하여 최초의 서사시 《체르케스인(人)들》(1828) 《카프카스의 포로》(1829)를 썼다. 1830년에 정식으로 모스크바대학 정치과에 들어가 독서와 시작(詩作)에 빠졌다. 이 시절에 희곡 《에스파냐 사람》(1830) 《연인》(1831), 서사시 《자유의 마지막 아이》(1831), 서정시 《모놀로그》(1829) 《파리─6월 30일》(1830) 《그 날이 와서…》(1831) 등을 썼다.

1832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중퇴하고 페테르부르크 근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미완의 소설 《와짐》(1833∼1834)을 썼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서민의 분노를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1834년에 학교를 졸업하자 청년사관이 되었으며, 서사시 《악마》(1829∼1841)를 계속 집필하면서 그 사이에 《귀족 오르샤》(1835), 희곡 《가면무도회》 등을 썼다.

다시 미완의 소설 《리고프스카야 공작부인》(1836)에서는 수도의 하급관리의 애절한 생활을 그렸는데, 이것은 고골리가 시작한 자연파의 방향에 대응한 것이었다. 1837년 푸슈킨이 결투로 비명에 죽자, 그의 죽음에 붙여서 쓴 《시인의 죽음에》에 의하여 유명해졌으나,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정부와 상류사회의 음모를 폭로하였기 때문에 카프카스로 좌천당하였다.

이 곳에서 대표적 서사시 《도망자》(1838) 《무티리》(1839) 《악마》(1841)를 집필하였다. 1839∼1840년에 발표한 연작소설 《현대의 영웅》은 이른바 레르몬토프의 사상과 작품계열의 집대성으로 그 주인공 페초린의 악마적 풍모는 1830년대 지성적인 귀족의 환멸과 반항의 형상이며, 러시아 문학사상 전통적인 ‘잉여자(剩餘者)’ 타입의 결정판이었다. 이것은 푸슈킨의 《오네긴》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목차
서문

미성년

지혜의 슬픔

보리스 고두노프

가면 무도회

검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