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푸르른 계절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들녘에는 무더위가 찾아 들었다. 중3과 고3 수험생들은 슬럼프에 빠지기 쉬운 시기이다. 그들의 마음에 도움이 될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칼럼을 쓰는 저자에겐 은인 같았던 책, 홍자성의 채근담이다.
한참 성적을 끌어올리며 보냈던 20년 전의 고3 시절, 무더위에 밤마다 설치며 몽롱한 상태에서 공부를 했고 결국 원했던 대학을 가지 못하고 낙방했다. 당시엔 모든 것이 막막하고 괴로웠다. 모의고사에서 전국 64등까지 했기에 원하는 대학은 당연한 것이고, 20살 대학생활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계획에도 없던 재수 생활은 마지막 청소년 시절을 스스로 고민케 했다. 세상을 다시 보고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바로 채근담으로.
홍자성은 중국 명나라 때 부패한 관직 사회에 초야로 들어간 선비였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유교를 기반으로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흡수한 문장은 방황하던 재수생의 생활을 바로 잡게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이 최고이니 물러가는 것이 곧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사람을 대할 때는 넉넉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이 되니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실로 자기를 이롭게 하는 바탕인 것이다.”
남들을 이기며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최고라고 여겼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왜 공부를 하는지” 모르고 공부했다. “왜 서울대학교를 가는지” 모른 채 가려고 했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홍자성은 무엇이 삶의 지혜인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공동체를 위한 중용이 무엇인지 가르쳐줬다. 홀로 동네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채근담은 마음에 평정을 가져다 주었다. “늦어도 괜찮다. 비록 실패해도 괜찮아.” 모두가 속도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방향이라는 점을 깨우치게 했다. 당시 수험생으로선 하기 힘든 사색을 통해 어쩌면 생각하는 힘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 지금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공간의 좁고 넓음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한가로운 사람은 넉넉하여 하루를 천 년보다 길게 느끼고, 마음이 넓은 사람은 좁은 방도 하늘과 땅 사이만큼 넓게 여긴다.”
물욕으로 인해, 명예욕으로 인해, 승부욕으로 인해 더럽혀진 내 마음에 이 구절은 생명수 같았다.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사느냐가 인생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내가 진정 만족하느냐가 내가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결정한다.” “앞으로 늘 주목 받으려 하지 말자.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지에 주목하자” 아침마다의 묵상은 지금도 이어져오는 훈련이자 습관이 되었다.
청소년기, 교과서와 문제집 외에 다른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는것을 안다. 쏟아지는 숙제와 시험 앞에 시간은 늘 족쇄가 된다. 하지만 한 번쯤 질문해 봐야 한다. “나는 왜 그렇게 성공하고 싶어하는지? 왜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왜 그렇게 옆에 있는 친구들을 이기려고 하는지?” 본연의 질문에 다른 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떠날 수 없으며,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 지금의 이 시대에 홍자성은 말한다. “물질적인 욕망을 덜고 덜어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으니 일체의 물욕이 사라지고, 번잡한 생각을 잊고 잊어 향을 사르고 차를 끓이니, 일체의 사물에 개의치 않는도다.”

고영 (경영 컨설턴트, 사회기관 단체인)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국내 유수의 회계법인 이사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 재능기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최초의 프로보노(전문분야에서 도움을 주는 재능기부)그룹인 SCG(Social Consulting Group) 대표로 사회적 기업과 시민단체, 국제기구를 위해 무료로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향후 SCG를 유엔 산하의 국제기구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도래할 통일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구축하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다.
• 저서 :『나비형 인간』 (아리샘, 2010)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꿈꾸는터, 2009) 등

책 읽는 것은 가장 경제적인 레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상당한 돈을 투자해야 하는데, 책은 만 원 정도에 사면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고 일생을 통해서 여러 번 읽을 수도 있어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가장 싼 레저, 가장 의미 있는 레저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 그 중에서도 소설 같은 경우는 일종의 타임머신이죠. 그래서 먼 미래의 세계에도 단숨에 날아갈 수 있고, 먼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또 공간 이동도 가능합니다. 태평양 너머도 책을 통해서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준다는 거죠. 사실 우리가 다 생각하고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세상의 욕망에 이끌려 가느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다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버스가 산모퉁이를 지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을 영화로 본다면 산도 나오고 버스도 나오고 모퉁이 길도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문학적 문장으로 읽으면 여기에 하나도 결정된 게 없습니다. 세상에 버스는 수없이 많으니까. 빨간 버스, 노란 버스, 시내버스, 시외버스, 또 산모퉁이도 마찬가지. 이 세계에는 얼마나 각각 다른 수많은 산모퉁이가 있나요?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거든요. 버스가 지나가고 산모퉁이가 떠오릅니다. 그 비밀스러운 머릿속의 스크린에 떠오르는 그림은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각자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서 자기만의 버스를 가져오고 자기가 기억하는 산모퉁이가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문학적 문장이라고 하는 건 작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독자들이 자기 삶을 보태서 비로소 제 3의 비밀스러운 스크린에 완성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말을 바꾸면, 독자가 함께 완성해가는 겁니다. 독자는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확실히 머리가 좋아집니다. 상상력을 통해 평소 쓰지 않는 부분까지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뇌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를 통해서 자기 성찰, 가령 버스가 산모퉁이를 지나가고 있을 때의 그 버스도 자기 인생과 관련되는 버스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인생의 과거 어느 시점을 되돌아보는 행위가 벌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자기 성찰, 생각하는 힘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의 시간을 저절로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범신의 소설을 읽을 때 여러분은 소설만 읽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내가 가고 싶었던 인생은 어떤 것인지, 잃어버린 것들을 환원해서 그야말로 복원시키는 역할을 문학적 문장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 읽으면 공부도 잘 하게 될 거에요.


저는 청소년 시절에 너무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렇게 권하고 싶진 않아요. 책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도 일러주고, 머리도 좋아지게 하고 즐거움의 쾌락적 느낌도 갖게 하는 좋은 점들이 있지만, 또 너무 어느 한 부분에 편중되면 우리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수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후자였죠. 과하게 책을 읽고 내 취미에 맞는 것만 뽑아서 읽었으니까요.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은 것처럼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골고루 읽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또 앞날에 대한 자기 정체성도 확보해야 할 시기기 때문에 편중되지 않는 독서법으로 자신을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요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죠. 자칫하면 우리가 그 많은 유혹 속에서 오히려 삶의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공유적이지 않고 내 정서의 즐거움을 위한 독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범신(작가)
•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으며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0~1980년대까지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발표, 80년대를 풍미한 인기작가로 뜨거운 지지를 받았으며 1981년에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며 그로부터 약 3년 후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여 순수문학의 가치를 한껏 드높이며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촐라체>, <나마스테>, <소금> 등 격조 높은 작품들을 통해 꾸준히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며 영화, 연극, 무용, 노래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저서 :『더러운 책상』 (문학동네, 2003) 『소금』(한겨레출판사, 2013) 『촐라체』 (푸른숲, 2013) 등 다수

불이 꺼집니다. 영사기가 돌아갑니다. 가슴이 콩콩 두근거립니다. 영화가 시작합니다. 때는 13년 전인 2001년. 저는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를 보기 위해 시사실 안에 있습니다. 그 영화를 번역하기 위해서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반가워서 놀란 것입니다. 영화의 앞부분만 보고도 저는 “앗!” 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왜 그랬느냐고요? ‘몬스터 세상’에 사는 괴물들이 그들 도시의 동력원인 인간 아이들의 비명을 채집하기 위해 ‘인간 세상’을 방문한다는 설정을 보곤 놀라워했던 것이지요. 그게 왜 놀랄만한 일이었느냐고요? 괴물이 방문을 통해 들락날락 하니까요. 그 장면에서 제가 옛날에 영문 판으로 읽은 판타지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랍니다. 과연 어떤 작품일까요? 그걸 공개하기 위해선 그 판타지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먼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판타지 소설의 지은이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가 조카들을 위해 지은 이야기에는 마법의 옷장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다가 옷장 너머의 세상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곳은 겨울 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마녀가 저주를 내린 것이지요. 이 판타지 이야기의 제목은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지은이의 이름은 C.S. 루이스이고요.
제가 <몬스터 주식회사>를 보다가 반가워한 이유는,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을 때의 옛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나니아 연대기> 속 옷장의 문이 <몬스터 주식회사> 속 방문으로 변신한 사실이 흥미로웠던 것이지요. 누군가가 이미 만든 아이디어를 창의적으로 각색해낸 발상이 놀라웠던 것이랍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몬스터 주식회사>를 만든 회사를 세운 사람이 스티브 잡스라는 사실을? 스티브 잡스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아이디어에 자기의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결합해서 그걸 혁신적 새 아이디어로 키우는 능력이 탁월했던 분이지요. 우리도 누군가의 아이디어와 나의 아이디어를 연결하여 새롭고 멋진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게 된다면, 우리도 창의적 인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C.S. 루이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그의 옥스퍼드 대학교 동료 교수였고, 절친한 친구였던 분이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였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여러분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의 지은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쓴 J.R.R. 톨킨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운명적인 걸까요? C.S. 루이스의 작품을 즐겨 읽었던 제가 훗날 <반지의 제왕> 3부작 영화도 번역하게 됐으니 말이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여러분께 영어 명대사를 하나 선물하고 싶어요. ‘Luck favors the prepared’입니다. ‘행운은 준비된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지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한 저에게 명작을 번역할 기회가 찾아온 건 그만큼 제가 준비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를 뜻하는 무비(Movie)를 한자로 ‘舞飛’처럼 표현하는 걸 즐긴답니다. 우리의 재미있는 상상이 ‘춤을 추며 훨훨 날아다니는 세계’가 영화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의 생각과 상상이 춤추며 날아다니게끔 ‘북(Book)돋우어주는’ 스승은 무엇일까요? 저는 책이라고 확신합니다.
책과 영화를 연결하는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다 보니 저는 지금의 영화번역 작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책과 무엇을 연결하는 놀이를 즐기고 있을까요? 우리는 창조적 상상력이 최고의 경쟁무기인 시대에 살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꿈꾸는 미래의 직업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북(Book)돋운’ 창조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직업이 된다면 여러분의 미래의 삶은 더 재미있고 멋지지 않을까요?

글쓴이
• 이미도
  영화번역가. 작가
• C로 시작하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그는 Culture(문화)- 문화체육관광부 위촉 문화예술 명예교사이며, Cinema(영화)-<슈렉>과 <쿵푸팬더> 시리즈, <니모를 찾아서>,<인크레더블>,<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을 번역한 21년차 외화번역가이다. 500편 가까운 영화를 번역하며 명실상부 국내 대표 영화번역가로 손꼽힌다. 또한 Connection(연결)-영화 속 아이디어와 명대사를 책 속 아이디어 및 명문장과 연결하여 책을 쓰는 10년차 작가로 영화를 통해 영어학습의 노하우를 전수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 저서 :『똑똑한 식스팩』 (디자인하우스, 2013)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웅진지식하우스, 2008) 『이미도의 영어선물』 (웅진지식하우스, 2010) 등 다수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그저 심심풀이로 읽는 아이였다. 심심할 때, 날은 덥고 (혹은 춥고) 딱히 갈 데도 없고 불러낼 친구도 없을 때, 그러니까 주로 방학이나 돼야 책을 펼쳤다. ‘아, 네가 있었지?’ 하는 마음이었다고 할까. 뒹굴뒹굴. 엎드려서 읽다가 팔꿈치가 배기면 책을 들고 누워서 읽다가 그도 힘들어지면 읽어나 비스듬히 벽에 기댔다. 그뿐인가. 낄낄거리다가 찡그리다가 가끔은 책을 덮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나중에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질질 침을 흘리며 자거나,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었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엄마가 그런 나에게 어떠한 훈계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렇게 방학을 보내곤 했다.
어쨌거나 몽롱하고, 아득한 시간이었다. 현실의 나는 지워지고, 책 속에서 만난 ‘누군가’만 살아 있는, (어쩌면 할 일 없는, 심심한 아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보다 그 ‘누군가’가 더 생생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때 나는 책 속의 ‘누군가’를 따라 그의 세상으로 기꺼이 떠나곤 했는데, 그 ‘누군가’는 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바뀌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가 ‘빨강머리 앤’이었다가 ‘올리버 트위스트’였다가 ‘데미안의 싱클레어’였다가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되는 식으로.
그래서 행복했다고 하면 이상한가? 나는 그랬다. 그들이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혹은 연인 같았으니까. 언제인가부터는 일부러 심심한 상황을 기다리게 됐다. ‘아, 심심해!’ 하고 기뻐했다. 책을 가득 쌓아놓고, 나의 빈 시간을 그들과 같이 보냈다. 놀랍게도 (성별, 나이, 국적 하물며 시대배경까지 제각각인) 그들은 언제나 내 손을 덥석 잡아주었고,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고, 은밀한 희로애락을 속속들이 보여주었다. 나는 때로 안타까워하고, 때때로 두려움에 떨면서 그들을 응원했고,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책 속의 주인공에게 푹 빠지는 경우가 점차 드물어졌다.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진지하게 시험문제 정답을 찾듯, 책을 읽게 됐다는 것이다. 주제와 의미, 상징과 은유에 집착했다. 책을 읽기도 전에 주제가 뭔지 사전정보를 찾아보거나,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나온 건 이런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서일 거야.’ 혹은 ‘이 표현은 이런 상징, 은유일 거야.’ 했다. 그래도 답이 안 찾아지면, 다른 사람은 어떤 답을 찾았나? 하고 다른 사람의 답을 훔쳐보기도 했다. 평론도 읽고 해설도 읽고 하면서.
그러니 주인공과 사귈 여력이 없었다. 주인공은 그저 작가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캐릭터, 인물이 돼버렸다.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지만 책 읽는 시간도 괴롭기만 했다. 아예, 책을 전혀 읽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이였을 때 얼마나 책을 읽는 몽롱하고 아득한 시간을 좋아했는지, 책 속에서 만난 ‘누군가’들을 사랑했는지 깨닫고 ‘이렇게 읽어서는 안 돼!’ 하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부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주제와 의미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다가 책 속의 친구를 놓치지 말기를. 그와 같이 몽롱하고 아득한 시간을 보내기를. 그러고 나서 주인공을 따라 책 속의 세상을 떠돌 때 자신의 감정(정서)을 곱씹으며 질문해 보기를. 왜 나는 주인공을 응원했을까? 왜 두근두근했을까? 왜 두려웠을까? 부끄러웠을까? 화가 났을까? 왜냐하면, 그 시간과 질문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여러분을 그 책의 주제와 의미로 이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신여랑(청소년문학 작가)
•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6년 브레이크 댄스에 매료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몽구스 크루》로 제4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작가가 되었다는 그는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점잖거나 밋밋하지 않고, 그들의 세계를 날것으로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책상머리에서 쓰는 소설이 아니라 생생하게 청소년들의 꿈과 고민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요즘 십대들의 현실이 담겨 있는 좋은 청소년 소설을 꾸준히 써나가려고 한다.
• 저서 :『드레스 입은 남자친구』 (한겨레아이들, 2013) 『어쩌다 보니 왕따』(우리학교, 2012) 『자전거 말고 바이크』 (낮은산, 2008) 『몽구스 크루』(사계절,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