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오래도록 가슴을 울리고 스스로에게 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 한두 권씩은 마음에 품고 있을 것입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내게 그런 책이지요.

‘분명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거야.’
밟히고 채이고 떨어져 죽으면서도 위로만 기어오르려는 무수한 애벌레들 속에서 노랑 애벌레가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지요. 맨 꼭대기는 ‘텅 빈 하늘뿐’이라고 말하는 몇몇 애벌레가 있긴 했지만, 많은 애벌레들은 위로 오르고자 하는 본능과 아래로부터 거칠게 밀어닥치는 힘에 밀려 감히 그 행렬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노랑 애벌레는 저 꼭대기가 그들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올라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꼭 그 애벌레 기둥을 따라 올라가야만 저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녀는 함께 기어오르자는 줄무늬 애벌레의 권유를 뿌리친 채 홀로 그 거대한 행렬을 역행하여 아래로 내려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혼자가 된 노랑 애벌레는 외롭고 두려운 시간들 속에서 줄곧 자신에게 이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다 ‘나비 꿈’을 꾸며 고치를 짓고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났을 때, 자신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러한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닫고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내어 고치를 짓지요.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노랑 애벌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오릅니다.

처음 이 책을 만났던 고등학생 때로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노랑 애벌레가 던졌던 질문들과 용기 있는 행동은 때로는 짙은 감동이 되고 때로는 아픈 채찍이 되어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특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이토록 점수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습관처럼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본능처럼 일류대를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 이 책은 벼락같은 울림이고 아픔이었습니다.
친구를 밟고 떨어뜨리며 위로만 기어오르려는 무수한 애벌레들, 그 애벌레들이 이뤄놓은 수많은 애벌레 기둥들... 텅 빈 하늘뿐인 꼭대기를 오르기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애쓰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 그대로였지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더 나은 삶’이란 어떠한 것일까?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을까?
그때부터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입니다.

노랑 애벌레가 남들에게 떠밀려 사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질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가 친구들을 짓밟지 않고도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달리 ‘나비’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이란 이런 것 아닐까요?
우리 모두 나비로 날아오르는 꿈, 이 꿈을 청소년 여러분들과 함께 꾸고 싶네요.

독서운동가, 국사봉중학교 교사
• 1959년 전북 부안 구암리 백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바닷가 마을인 줄포로 옮겨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책을 통해 울타리 밖 세상을 넘겨보고 꿈꾸는 법을 배웠다. 1984년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이 되었다가 1994년 복직되어 현재 서울 국사봉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일그러진 우리의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학교도서관이 학교의 심장’이 되어야 하고 책 읽는 가정, 책 읽는 학교,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요 우리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여,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과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 공동대표로, ‘학교도서관저널’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도서관의 활성화와 독서교육 운동에 힘을 쏟고 있다.
• 저서 :『도란도란 책모임』 (학교도서관저널, 2013) 『책으로 크는 아이들』 (우리교육, 2010) 『학교도서관에서 책읽기』 (우리교육, 2005) 등 다수

나의 인생은 책의 인생이다
임석재(이화여대 건축학부 교수)

나의 인생은 책의 인생이다. 나는 교수가 된 뒤 20년 동안 47권의 책을 썼다. 소장하고 있는 책만도 만 권이 넘는다. 그것도 대문짝만한 건축과 미술 책들이다. 나의 하루는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난다. 읽다가 쓰고 쓰다가 읽는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것은 나의 직업이자 취미이자 친구이다. 나의 인생 전부이다.
책은 나의 왕국이다. 책은 나의 백성이다. 나는 책을 사랑하고 책도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내 백성을 데리고 나만의 왕국을 짓는다. 내 왕국에는 내가 쓴 건축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유럽 역사를 가로지르고 한국 사회현실을 진단한다. 유럽의 성당과 한국의 사찰을 비교한다. 미술작품과 건축물을 비교하기도 한다. 한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유럽의 주택에서 사회학을 읽어낸다. 서양미학과 동양사상을 해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쓰느냐고. 더 근본적으로 왜 그렇게 많은 책을 쓰느냐고.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타고난 천성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를 않았다. 지금은 건축역사와 이론을 전공하는 학자가 되었지만 내 글쓰기의 출발은 문학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광수, 김동인, 심훈 등 한국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감동 깊게 읽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읽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글쓰기에 빠졌다. 그때까지 읽은 것들을 소화해서 나만의 얘기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초중고 때 나의 생활은 책으로 시작해서 글쓰기로 끝났다.
어머니의 영향도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이긴 했지만 학구열이 정말로 대단한 분이셨다. 어머니 역시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으며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셔서 주한 대사 부인들과 영미 소설을 읽고 영어로 토의를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르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공부하라고 하신 적은 없지만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나의 인생은 일찍부터 책의 인생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나는 혼자서 여러 가지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이런 상상을 학술적으로 연계시켜 글로 써내는 데 재주가 있었다. 글은 책으로 발전했고 결국 이것이 직업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상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상거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항상 책 쓸 거리가 넘쳐난다. 늙어서도 책을 쓰고 싶어서 건강관리도 잊지 않고 챙긴다.
이런 나를 세상에서는 ‘모범생’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겉만 본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상상은 그렇게 우아한 작업은 아니다. 책 쓸 소재가 줄줄이 나오긴 하지만 어떤 때에는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책을 쓰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옆에서 보기에는 쉽게 써대는 것 같지만 당사자인 나는 영혼까지 투입해서 벌이는 힘든 작업이다.
물론 책 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 그래서 나의 직업이자 취미이자 일상이자 인생으로 삼았다. 재미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힘든 것도 사실이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고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글쓰기를 마감하는 오후에는 기진맥진해진다. 이것을 참고 책을 계속 쓰는 일은 옆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우아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책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되는 한 쓰고 싶다.

저자정보
•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1호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지금까지 67권에 달하는 저서를 펴냈으며, 주 전공인 건축 역사 및 건축 이론을 주제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와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 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연구와 집필에 머물지 않고 그동안 공부하면서 쌓은 내용을 실제 설계 작품에 응용해서 작품 활동도 하고 있다. 건축사학자이자 건축가이며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다.
• 저서 :『현대건축의 지평 1, 2』 (인물과사상사, 2013)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 (인물과사상사, 2012) 『서울 건축』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서양건축사』 (북하우스, 2011) 등 다수" />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아버지 방의 책장에는 이광수의 <무정>,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서적을 비롯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등 온갖 종류의 철학서와 사상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틈날 때마다 아버지 서가에 꽂혀있는 책제목을 줄줄이 외우며 보냈다. 서가 앞에 서면 그때까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책의 대부분이 어린 내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저 저자 이름과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지적 포만감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볼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갈 때마다 당신이 읽을 책은 물론이고, 어린 내가 읽기에 좋은 책도 함께 사왔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바로 <안네의 일기>이다.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이 말을 듣고 누구나 의외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바꾼 책은 대개 감동적인 문학작품이나 역경을 이겨낸 위인들의 전기 혹은 세상을 바꾼 사상가들의 저서처럼 거창한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안네의 일기>는 나치즘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황금 같은 소녀 시절을 어두침침한 은신처에서 보내야 했던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 소녀의 일기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 정도로 세상을 오래 산 것도 아닌, 이제 겨우 아동기에서 벗어난 풋과일 같은 사춘기 소녀의 일기가 인생을 바꾸어 놓다니..... 이것을 읽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마흔 해가 넘을 때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안네의 일기>만큼 충격적으로, 그리고 <안네의 일기>만큼 전폭적으로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안네의 일기>를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갑자기 세상 희노애락의 비밀을 알아버린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라고나 할까. <백설 공주>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가 갑자기 유치해 보이고, 뜻도 모를 낭만파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삶의 슬픔이니 운명이니 비애니 하는 말들을 주워섬기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일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네는 예술적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소녀였다. ‘키티’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일기에서 그녀는 그 나이 또래 소녀들이 느끼는 내밀한 감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안네의 일기를 읽고 나서 나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안네처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일기쓰기는 나의 생활이 되었다. 일기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세계였으며, 나는 그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정말 예상치 못하게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열병처럼 끓어올랐다.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며칠 동안 끙끙거린 끝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해서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친구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이 소설 저 소설에 나오는 상투적인 줄거리를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소설을 쓸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랫동안 무모한 소설쓰기에 매달렸다.
처음 일기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내가 평생 글을 써서 먹고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안네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자기 고백 욕구를 일깨웠으며, 이것이 결국 나를 글쟁이로 만들었다. 그렇게 <안네의 일기>가 내 인생을 바꾸었다.

• 음악칼럼니스트
• 1956년 서울 출생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열정에 힘입어 어릴 적부터 음악 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며 자랐다. 이화여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다. 그 후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글쓰기를 즐기는 특기를 살려 방송에서, 강의실에서, 책에서 말과 글로 음악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KBS 클래식 FM을 비롯한 여러 클래식 프로그램의 진행과 구성을 맡아 치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알렸다. 지금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장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 강사로,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중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느끼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 저서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3)
  『영화와 클래식』 (청아출판사, 2013)
  『영화는 클래식을 타고』 (21세기북스, 2011)
  『스토리 클래식』 (아트북스, 2011) 등 다수/>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으시죠? 누군가 내게 물어온다면 나는 매우 난감해할 것이다. 근래엔 독서다운 독서를 해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순무식하게, 책을 읽은 권수로만 따진다면 한 달에 적어도 수십 권에서 많게는 일이백 권 가까이는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독서라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편함으로 거의 매일 책이 오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택배 상자로도 책이 배달되어 오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어떤 의무감에서 쓱쓱 읽거나 그야말로 ‘검토’ 수준으로 읽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기다리던 책도 몇 권 정도는 끼어있기 마련이지만 책에 빠져 보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별생각 없이 술렁술렁 책장을 넘기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서라 치부할 수 없다. 그런 것까지 독서의 범주에 넣는 것은 너무 뻔뻔한 일이다.
얼마 전 아름다운 순례길을 걸었다. 전북 일원을 잇는 그 순례길은 총 9개 코스로 되어있었다. 대략 240킬로미터쯤 된다고 했다. 그중 제1코스를 걸었다. 전주 전동성당에서 완주 송광사까지였다. 다행히 길은 구불구불했다. 강둑을 따라 걸음을 떼기도 했고 풀과 나무가 우거진 좁은 흙길을 만나기도 했다. 산 아랫길을 따라 걷다가 재를 넘으면 옹기종기 작은 마을이 저만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략 28킬로미터쯤 되는 길이었다.
웬 순례길? 나는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특정 종교에 심취해있는 사람도 아니다. 다른 이들이 걷는다기에 그저 묻어 걸었다. 다만, ‘몸으로 된 책’을 가까이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기는 했다. 그 순례길에는 문규현 신부라는 책도 있었고 안도현 시인이라는 책도 있었다. 너무나 두꺼운 책들이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책장부터 넘기고 보자는 꿍꿍이도 있었다. 동행하는 사람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빼어난 책도 있을 터였다. 알짜배기 책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때 함께한 사람은 80여 명이나 되었다. 땀내를 넘어 쉰내가 풀풀 나는 살아있는 책을 도란도란 읽으며 나는 순례길을 걸었던가. 나는 자연스레 문규현 신부님과 나란히 걷기도 했고 안도현 시인과 보폭을 맞추기도 했다. 물고기와 얘기를 나눈다는 순수 청년과 걸을 땐 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문규현 신부님을 산 중턱 바위에 앉아 펼쳐보았다. “박 시인 먼저 가. 심장이 나더러 산은 절대 넘지 말라고 해. 그렇지만 내가 어디 말을 듣는 사람인가? 허허. ” 그때 누군가 신부님께 등산용 지팡이를 내밀었다. 물고기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막강 순수 청년이었다. 신부님은 지팡이를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청년은 지팡이를 신부님 옆에 놓고 총총 나아갔다. 산을 넘은 신부님은 걸음을 재촉하는가 싶더니 지친 사람들의 가방까지 들어줬다. 신부님은 지친 사람들을 끌고 완주했다. 신부님은 분명, 질긴 책이었으나 아프게 아름다운 책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나무도감에 가까웠다. 안도현 시인은 걷는 내내 나무 이름을 불러주었다. 사실 나는 나무 이름을 잘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촌에서 나고 자랐고 줄곧 촌을 들락거려 보통사람들만큼은 안다고 생각해왔다. 딸애와 산에 갈 때면 때죽나무나 국수나무 그리고 팽나무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 안도현 시인한테 나무 공부를 하는 일은 즐거웠다. 노래에서 만났던 비목의 이름을 나도 불러줄 수 있게 되었고 덜꿩나무 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덜꿩나무 꽃은 가막살나무 꽃과 거의 같다는 말도 덧붙였으나 나는 가막살나무 꽃을 몰랐다. 팽나무는 다 같은 팽나무인 줄 알았으나 팽나무 과에는 팽나무, 좀왕팽나무, 왕팽나무, 검팽나무 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귀한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집에 와서 복습하면서 그간 내가 물박달로 알고 있던 나무는 나무껍질에 코르크가 발달한 굴참나무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물박달은 굴참나무와는 전혀 다른 나무였다. 굴참나무에게도 물박달나무에게도 머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길을 걷고 난 후, 나는 길과 순례에 관한 책을 열댓 권 정도 주문했다. 식물에 관한 책을 뒤져보기도 했다. 주문한 책은 이제 한두 권씩 내 앞으로 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 안도현 시인이 나를 잠깐 보자 했다. 시인은 내게 책을 내밀었다. ‘한국의 나무’라는 책이었다. 나무도감에게서 나무도감을 받다니!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으시죠? 몸과 맘이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몸과 맘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 독서도 독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감흥 없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조만간 나는 무작정 길을 나서게 될 것만 같다.

글쓴이 : 박성우(시인,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71년 정읍에서 태어나 원광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아동문학을,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 및 출판 지원 사업에 청소년시가 당선되면서 청소년문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거미』(창비)『가뜬한 잠』(창비)『자두나무 정류장』(창비), 동시집으로 『불량 꽃게』(문학동네)가 있다. 청소년시집으로 『난 빨강』(창비)이 있고 그림책으로 『암흑식당』(샘터)이 있다. 신동엽창작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성우 트위터 : http://twitter.com/ppp3371] 저서 :『암흑식당』 (샘터, 2012) 『자두나무 정류장』 (창비, 2011)『난 빨강』 (창비, 2010)『가뜬한 잠』 (창비, 2007)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