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갔던 첫 학부모 참관수업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학부모가 오는 참관수업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좀 긴장을 하리라 기대했건만 엎드려 자는 아이, 무기력하게 딴 생각하는 아이, 책도 노트도 없는 아이가 교실에 흔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참관수업을 두고 “들어 가봤자 속만 상해서 안 간다”는 말이 예사로 나온다.
반면 학교에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소강당을 가득 메운 엄마들이 숨을 죽이며 강의를 경청한다. 대입 설명회가 끝날 즈음 한 엄마가 “혹시 이런 내용을 아이들도 알고 있나요?”하며 질문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아이가 들어야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도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엄마는 울먹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늘 우리 아이들이 책이라도 읽는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왠 책이냐고 하겠지만, 사실 입시위주의 학교 교육에서 많은 아이들이 낙오한다. 하지만 입시라는 괴물과 맞닥뜨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이들은 자신이 낙오자라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공부에 초연한 듯 수업시간에 떠들고, 그 까짓 공부나 대학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친구들과 뒷골목을 몰려다닌다. 그럴수록 부모들의 닦달은 심하다. 엄마는 입만 열면 공부와 성적과 학원 소리를 하니 그 어떤 아이인들 부모와 말을 하고 싶으랴. 기껏 게임과 담배와 또래집단에 몰두하며 삶을 소모할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면, 지금 당장은 좋은 대학에 못 갈 수도 있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과는 다른 나를 꿈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책이 가진 놀라운 자아성찰의 효과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은 꿈을 꾼다. 체게바라 같은 혁명가가 전선에 뛰어들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가난하고 환경이 어렵고 현재의 삶이 비루해도 책을 읽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면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어른들이 책을 통해 이런 치유와 성찰을 경험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동화 을 쓴 황선미 선생은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이후 야간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했다). 겨우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게 친구들이 모두 공부하고 있을 그 대낮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웠겠는가. 그 절망스러운 시간 소녀는 책을 읽었다. 만약 그때 책을 읽지 않았다면 소녀는 작가가 아니라 아직도 삶을 부끄러워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책읽기는 여러 장점이 있다. 내가 어릴 때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교양과 지식을 습득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너나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며 경쟁에서 도태될까봐 두려워하는 우리에게는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 치유의 기능이다. 흔히 정신과의사에게 상담하는 것만이 정신과 치료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 저자와 직접적으로 만난다.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한다. 그때 우리가 지닌 외로움과 슬픔과 불안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내가 겪은 삶 전체가 투명하게 보일 때도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 대하고 인정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책이 이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책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오랜 동안 열등감에 시달리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고, 쓸데없는 자존심은 세지만 정작 중요한 자기존중감은 턱없이 낮은 사람이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든가 싶어 울 때도 많았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엄청난 상실감의 정체를 확인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깨달았고,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의 문제는 남았지만 적어도 어제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누구에게든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슬프고 외롭고 힘이 들 때 친구가 필요하다면 책이 내게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여 보라는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

글쓴이 : 한미화(출판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에서 북클럽 패널로 출연했었으며, 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읽은 책에 흔적 남기는 걸 좋아하는 ‘밑줄 긋는’ 아줌마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등의 책을 썼다. 저서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 공저』 (시공주니어, 2013) 『잡스 사용법』 (거름, 2012)『책 읽기는 게임이야』 (웅진주니어, 2011)『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 2』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 등 다수 /

내 이야기 좀 할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어. 어른들은 새벽부터 농사일하러 나가고 누나랑 형은 아침을 챙겨먹고 학교로 향했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꼬맹이들은 마을회관에 모였어. 이곳에 작은 서가가 하나 있었어. 한글을 모르던 다섯 살 무렵이니까 서가의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 또래 친구들은 책과 잡지의 표지에 집중했어.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두꺼운 종이를 찢어서 네모딱지를 만들 수 있었거든. 그런데 나는 잡지 속 내용이 궁금했어. 네모난 칸이 여러 개 있고 그 안에는 그림과 글이 있었어. 글을 읽지 못했지만 연속적으로 그려진 여러 개의 그림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지. 그림이 말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어. 서로 힘을 겨루기도 하면서 뭔가 흥미 있는 일을 벌이고 있었지. 만화였어. 만화를 처음 만나게 된 거야.

그 때 일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잡지를 집으로 빌려가서 누나나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읽어 달라고 했어. 한 달에 한번 연재되는 짧은 내용이라 금방 읽어버리고 아쉬워했지만 다음 달을 기다리면서 만화 속 내용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되새겨봤지. 만화주인공이 라이벌과 야구 시합을 펼치는 것처럼 딱지치기 라이벌과 승부를 벌였고, 강타자와 대결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했던 것처럼 살얼음이 언 저수지를 건너는 모험에 도전하기도 했어. 만화를 보며 한글을 익혔고 만화를 보면서 바른생활과 탐구생활을 배웠으니 만화책이 내게는 교과서 역할을 한 셈이지. 그 교과서는 나중에 알고 보니시리즈로 유명한 이두호 선생님의 이었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나의 만화읽기’도 본격화 됐지. 동네에 만화방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모아서 만화책을 빌려보거나 사서봤어. 를 만났고등을 알게 됐지. 당시 만화책과 만화방은 내게 테마파크였어. 꿈과 모험, 환상이 가득한 곳이었지. 이상무, 이현세, 허영만 등의 유명 만화가를 알게 됐고 만화가의 전작읽기에 도전하기도 했어. 고등학생 시절에는 그 유명한 일본만화 과 에 푹 빠졌어. 요즘 인기 있는 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풍적이었지. 유명 만화가의 만화나 일본만화가 인기를 얻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 작품들 속에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가치’가 담겨있었지. 그 시기의 독자들은 우정과 사랑, 도전과 노력, 승리와 열정 등의 가치를 만화작품에서 찾았던 거야. 하지만 만화작품이 인기를 얻을수록 만화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불거졌어.

만화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떤 만화는 청소년들을 병들게 한다고 했어. 어른들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 실제로 어떤 만화작품은 내가 봐도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만화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었지. 이원복의 , 손상익의 , 김창남의 , 원용진의등 만화에서 출발해서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관련서들을 읽었어. 그러다보니 대중문화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됐지. 회화?연극?소설?영화 등 지금 우리가 예술로 생각하는 모든 분야도 초창기에는 사회문제가 됐었고 이를 보편적 대중문화와 예술로 받아들이게 하는 논쟁의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됐지. 그 때 생각했어. 내게는 교과서였던 만화책이 다른 이에게는 다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화를 가치 있는 예술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수많은 비평 활동과 이론 연구결과가 나와야 하고 사람들에게 재인식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그런데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됐고 만화평론가가 됐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본의 유명 만화잡지 중 (1968년 창간)라는 것이 있어. 이 잡지의 전설적인 편집장 중 한명이 나가노 다다스야. 이 사람이 설문조사를 해보니 아이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우정’,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력’, 가장 기쁜 것은 ‘승리’였데. 그래서 이 사람은 소년을 대상으로 한 만화 작품에 이 세 가지 주제가 들어가도록 했고 대성공을 거뒀어. 이후 많은 만화와 잡지가 이를 따라했고 ‘소년만화’라는 하나의 장르가 만들어졌지. 내가 소년기에 본 만화들 역시 우정을 쌓으며 성장하고 노력하면서 꿈을 찾고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내용이었어. 만화에는 원래부터 ‘재미’만이 아니라 ‘가치’가 들어가 있던 거지. 그런데 만화에서 ‘재미’만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보이지 않고, ‘가치’만 찾으려는 이에게는 ‘재미’가 부족해지지. 이를 잘 조정해야해. 과하다 싶으면 조금 거리를 두는 것도 현명한 만화소비 방식이 될 거야.

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창작과 교수197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박석환은 유년시절 이두호의 만화로 한글을 깨우치고 이상무의 만화로 울지 않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현세의 만화를 보며 도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았고 허영만의 만화를 통해 현명한 어른으로 사는 방법을 찾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언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세종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1997년신춘문예로 등단해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영상대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저서 :『만화문화와 만화작품분석 - 공저』(북코리아, 2011) 『한국의 만화가 1, 2 - 공저』(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10)『만화보다 쉽고 재미있는 만화리뷰쓰기』(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코믹스만화의 세계』(살림, 2005) 등 다수

몇 해 전부터 작가가 직접 학교로 찾아가는 ‘독서스쿨’에 초대되어 중고등학생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딱딱한 강연 형식에서 벗어나 마술, 뮤지컬 등의 사전 공연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짧은 강연 뒤에는 질의응답을 통해 청소년들과 직접 대화하는 이른바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교육청 관계자나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을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른들은 한결같이 훌륭하고 지당한 말씀을 하신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많이 읽으라고.......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이야기 끝에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과 독서의 장점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른들은-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어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책을 많이 읽으면 논술이나 글쓰기에 도움이 되고 국어 과목의 점수도 잘 받을 수 있다고 주장 혹은 설득한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이 담겨있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국어뿐만 아니라 교과 과정의 모든 과목이 독해력과 추론능력, 논증능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니 그 힘을 키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잘하기 위해 숙제하듯 공부하듯 책을 읽는다는 것은 머리와 꼬리가 뒤바뀐 일이다.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예를 든다. 언어 영역 시험에 가장 많이 출제되는 작품의 저자 중 한 명인 최승호 시인이 언젠가 자신의 시로 출제한 시험 문제를 풀었다 한다. 그 성적은 0점. 그 소리를 들은 신경림 시인이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기 시로 낸 문제인데 어떻게 빵점을 받을 수 있어? 그래도 나는 50점이나 받았는데!”언젠가 나도 내가 쓴 소설을 지문으로 한 시험 문제를 본 적이 있다. 그 문제인즉슨, 어떤 대목에서 주인공이 문득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는데 그때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쓴 소설 속에 내가 만들어낸 인물인데, 나 역시 주인공이 무슨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라고!
본디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하고 저러저러해야 마땅하다고 아무리 주워섬겨도 삶에는 정답이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책읽기가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시험 문제처럼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꿈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상처와 절망을 견디는 데 있어, 앞서 살고 먼저 앓았던 이들의 지혜와 경험이 가장 눈 밝은 길라잡이가 된다. 그래서 좋을 때보다는 힘들 때 진정한 독서의 위력이 발휘된다. 몸의 면역력이 강화되면 질병에 대한 견딜힘이 강해지는 것처럼 독서를 통해 마음의 힘이 길러지면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위로이자 의지 삼아 절망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실용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만을 기대하다 보면 정작 책읽기에서 멀어지게 된다. 독서기록장 혹은 독후감에 대한 강요는 책읽기를 지겨운 숙제로 만든다. 독서문화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고안 중이라는 독서 능력평가시험이며 독서왕 선발은 책읽기에 대한 마지막 한 방울의 즐거움마저 앗아갈 공산이 크다. 내 두 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끌려간다면 아무러한 천국도 괴로운 지옥이 될 수밖에 없으리니.
내가 지금껏 가장 열심히 소설을 읽었던 때는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소설책을 읽는다고 선생님에게 소설책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던 그 시절이었다. 네모난 교실에서 네모난 꿈에 갇혀 살았던 시절에 아무런 경계도 구속도 없는 이야기의 세계는 더없이 황홀하고 매혹적이었다. 읽지 말라니까 더 읽었다. 오기로, 반항으로, 앙큼한 도발로. 그리하여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야단을 맞던 그 아이는 소설을 써서 먹고 사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쓸데없는 짓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요 길이었으므로.

어린 날부터 읽고 쓰기를 좋아하다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작가 김별아는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93년 에「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2005년 장편소설「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산문집「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가족판타지」,「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등을 통해 소설가이자 한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의 깨달음을 담았고, 아들과 함께 오른 백두대간 이야기「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펴내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 또한, 자신의 아이에게 엄마가 쓴 글을 읽게 해주고 싶어「장화홍련전」,「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 「거짓말쟁이」,「네가 아니었다면」등의 어린이 책을 집필하였다. 저서 :『불의 꽃』 (해냄, 2013) 『삶은 홀수다』 (한겨레, 2012)『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해냄, 2012)『미실』 (문이당, 2005) 등 다수

일간신문의 문화부 기자였던 십오 년 전, 내 책상에는 늘 새로 나온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거의 모든 책이 나의 손길을 기다렸다. 아침마다 출판사 편집자가 정성껏 포장한 봉투를 뜯어내, 표지부터 내용까지 천천히 훑어보면서 어떤 책을 기사로 소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일상 업무였다.
책상에 쌓인 책을 모두 읽고 싶은 탐욕으로 날마다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눈이 벌개질 정도로 밤을 새워 책을 읽고는 몇 권의 책을 골라 기사로 소개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던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문화부장 선배에게 사직서를 냈다. 선배는 ‘월급 받으면서 책 읽고, 공부하는 이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려느냐?’고 물었다. 그에게는 매우 뜻밖이었을 이야기로 화답했다. ‘책 좀 읽으려고요!’ 난데없는 대답에 선배는 아마도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그게 사직서를 낸 이유의 전부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분명히 선배에게 그렇게 답했다. 마흔 살에 접어들던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참으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마음에 담아둘 만큼 깊이 있게 읽은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기사 마감에 쫓겨 책을 읽으면서도 빠져들지는 못했다. 저절로 일어나는 스스로의 느낌은 자제했고, 온당한 가치 판단을 위해 비교할 만한 옛 책을 뒤적이는 일도 삼가야 했다. 책 소개 기사 또한 주관과 판단을 되도록 배제한 채 냉정하게 써야 했다. 분명 책을 읽긴 읽었으나 내 안에 담지 못하는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직장을 버리고 나는 곧바로 낡은 시집 한 권 들고 길 위에 올랐다. 길 위에서 나는 나무를 찾았다. 나무를 찾아 다니던 처음에도 서둘러 더 많은 책을 읽으려던 그때처럼 한 그루의 나무를 더 만나고 싶은 조급증에 허둥댔다. 어두워지는 저물녘까지 깊은 산중에서 나무를 찾아 헤맸다.
나무와 더불어 몇 해를 지나며, 책 속에 파묻혀 책을 그리워 하던 신문기자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이처럼 숱하게 많은 나무들에 파묻혀 살다가 다시 또 어느 날 불현듯 나무에게 또 이별 통보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다잡았다. 중요한 건 더 많은 나무가 아니라 마음 깊이 담아둘 한 그루의 나무였다. 자연히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천천히 나무에 다가서서, 오래도록 자세히 바라보기로 했다. 동트기 전에 나무 앞에 서서 해질 녘까지 내내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는 일도 허다했다. 때로는 하루 이틀 혹은 몇 해에 걸쳐 한 그루의 나무를 되풀이해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자 나무는 관찰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이 땅과 하늘을 함께 호흡하며 진정한 교감을 갈망하는 생명체로 오롯이 다가왔다. 비로소 나무가 가만가만 내 안에 들어와 자리잡았고, 나도 차츰 나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많은 나무를 찾아본다 해도 그 안에서 실제로 나의 느낌을 더 깊고 새롭게 할 수 있는 나무의 절대 양에는 한계가 있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진정으로 바라본 것과 스쳐 지나듯 바라본 것은 분명히 다르다. 절대 독서량을 늘리려 애면글면하기보다는 한 권의 책을 가슴 깊이 담아두려 했던 마흔 시절의 터무니없는 깨달음과 똑같은 이치다.
메시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페이스북 트위터의 타임라인에는 얼굴 모르는 친구들이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은 라디오처럼 듣는 둥 마는 둥 훑어볼 수밖에. 간간이 느낌에 닿는 좋은 글을 만나게 되면 ‘공유’ 버튼을 눌러, 나의 타임라인에 옮겨놓기도 하고, 다시 볼 수 있도록 저장도 해두지만 그뿐이다. 되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너무 많은 까닭이다.
하릴없이 놓치게 되는 많은 메시지를 되찾아 헤매는 일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단 한 줄의 메시지, 혹은 단 한 권의 책을 마음에 깊이 담아 두기 위해, 마음을 열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속도가 늦춰진 텅빈 마음, 그 자리에 한 권의 책이 놓인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한 권의 책은 필경 세상의 흘러가는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나’라는 그릇을 키우는 길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감동은 오랜 기다림과 설렘이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 넘치도록 빠르게 흘러가는 정보의 시대에 삶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한 권의 책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다.

고규홍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열두해 동안 중앙일보 문화부 , 사회부 기자를 지낸 뒤, 나무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나무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나무 칼럼을 쓰고, 방송과 강연 등을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나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해주고 있다. 2000년 봄부터 지금까지 줄곧「나무를 찾아서」라는 칼럼을 써서 홈페이지 솔숲닷컴(http://www.solsup.com)을 통해 나누고 있다. 이 홈페이지는 2008년 ‘청소년 권장 사이트’로 지정되었었다. 현재는 한림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은퇴’가 허락된다면, 오전에 희랍어를 공부하고 오후엔 지는 석양 바라보며 첼로를 연주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저서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휴머니스트, 2012) 『나무가 말하였네 1-2』(마음산책, 2012) 『천리포에서 보낸 나무편지』(아카이브, 2011)『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나무 세트 전3권』(다산기획, 2011) 등 다수

얼마 전에 광주 MBC에서 주최한 “말하는 독서열차”에서『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책의 저자로 학생들에게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더불어 왜 책을 읽어야하는 지에 대해 설명했다.
학생들은 왜 책을 읽어야하는 지에 대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처음 이 책은 학생들에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지만, 나의 목적은 과학수사에 대한 학생 및 일반인들의 이해를 넓혀 범죄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범죄현장에서 의뢰되는 각종 증거물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하여 범죄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수많은 범죄를 다루면서 얻은 지식들을 같이 나누어 범죄를 예방하는 것도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학생들 대부분 과학수사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장 많은 질문을 한다. 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답장을 해 주고 있다. 그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이 답장을 통하여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독서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의 씨앗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키워간다면 나중에는 훌륭한 과학수사 요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독서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항상 그 표적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범죄시계(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행 등 5대 범죄가 발생하는 주기를 시간으로 나타낸 것)는 2005년을 기준으로 절도가 2분57초, 폭력이 1분54초, 강간이 1시간 14분 56초, 강도가 1시간 37분 23초, 살인이 8시간 3분 19초였다. 전체적으로는 약 18초 당 1건의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범죄는 예방이 최선이다. 범죄는 아는 만큼 예방할 수 있다. ”
미리 알고 대처를 한다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혹시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 해도 현명하게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면 내가 의도했던 가장 주요 목적 중의 하나였던 “과학수사 저변화로 범죄예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읽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독서를 통해 취득한 지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되는 것이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책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였지만 수없이 많은 좋은 책들이 우리의 미래와 삶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 책은 저자의 수없는 고민과 깨달음, 평생 공부한 지식들이 녹아 있는 경험과 지식의 보고이다. 이러한 소중한 것들을 가장 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책이다. 책에서 얻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지식들은 보다 지혜로운 삶을 경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박기원(중앙대학교 이학박사)은 1989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입사하여 23년 동안 오로지 과학수사 분야에서 일을 해왔다. 그동안 실종 개구리소년 신원확인,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희생자 신원확인, 서래마을 영아살해 유기사건 감정 등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하였다. 또한 꾸준한 연구 및 수사실무자들의 교육을 통하여 과학수사의 발전에 기여하고 저술 작업 등을 통하여 과학수사 및 법 과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사건을 통하여 다양한 과학수사 분야를 소개한 ‘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전 3권)’ 등이 있다. 이밖에도 많은 논문과 번역서, 연구보고서가 있다. 현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감식센터에서 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 :『재미있는 과학수사 이야기』(가나출판사, 2012) 『나를 존재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위하여』(글봄, 2010) 『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 세트 전3권』(살림, 2008)『DNA분석과 과학수사』(살림, 2008)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