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내용

1976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꽤 세월이 지난 후에 초등 동창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한 동창이 나에게 너는 책을 열심히 읽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내가 그랬었나 하면서도 다시 기억을 떠올려 보니 내가 책을 많이 탐하기는 했다. 어디를 가든 책을 먼저 찾았고 내가 안 본 책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보거나, 빌려서 볼 수 있으면 빌려 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책을 탐하기는 했지만 독서를 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학교 공부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형성된 책 욕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틈만 나면, 심지어 외국에 나갈 때도 서점에 일부러, 또는 눈에 띄면 들어갔고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사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많은 종류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책 자체가 귀한 시절이었다. 어느 집이든 책이 많지 않았고 나이 어린 사람이 읽을 책은 드물었다. 도서관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장서도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읽었고 반복해서 읽은 책도 많다. 무차별적으로 책을 읽다 보니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친구 집에 회고록 전집이 있어 그중 한 권을 꺼내 읽은 적이 있었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포기했다. 아직 인생을 생각하기도 어린 나이에 어른용 회고록을 읽으려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는 몰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경험으로 나는 위인과 관련된 책은 다 재미가 없다는 편견을 갖게 됐고 그 후로 위인전 종류는 읽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 우연히 사 준 위인전을 아이가 재미있다고 읽는 것을 보고서야 주제가 아니라 책의 내용이 문제였다는 것을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원고 청탁을 받고 어린 시절 내게 제일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인가 떠올려 보니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었다. 꽤 많이 팔렸던 전집으로 알고 있다. 집에 있던 책이었기에 언제든 원할 때면 꺼내 읽을 수가 있었다. 심심할 때면 이미 다 읽은 책들이지만 내키는 대로 뽑아서 다시 읽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이름처럼 그 전집에는 세계 각국에서 나온 문학 작품을 어린이들이 읽을 만하게 압축한 책들이 포함됐다. 『삼국지』, 『소공자』, 『소공녀』, 『왕자와 거지』, 『보물섬』, 『알프스의 소녀』, 『이솝 우화』 등 전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왜 주인공은 그렇게 했을까 등 많은 상상을 하곤 했는데 내 자신의 세계관,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반복해서 읽었던 책들 중에서도 이 전집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만큼 내 뇌리에 많이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문학 작품을 압축하여 동화책으로 읽는 것을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하여 성인이 되어 원작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도 성인이 되어서는 이런저런 읽어야 할 것들에 밀려 내용을 아는 작품은 독서 순위에서 뒤로 밀어 놓다 결국 읽지 않은 것이 많다. 몇 년 전 상영되었던 영화 이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의 소재가 되었을 때 『레미제라블』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에 여러 친구들이 공감했다. 나 역시 어릴 때 읽은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작품을 찾아 읽게 되지 않으니 그렇게나마 읽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압축되었어도 인간의 삶을 다룬 책의 내용은 어린 소년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가 그런 종류의 책을 읽을 나이가 되었을 때 내가 읽었던 것과 비슷한 문학 전집을 사 주었다. 책이 넘치는 요새는 전집보다는 아이가 원하는 책을 낱권으로 사는 게 더 낫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내 방에서 쉽게 뽑아 읽었던 책들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듯 내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외로 전집을 구입했다.
내 어린 시절의 독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만화였다. 그때는 거의 동네마다 만홧가게가 있었다. 만화를 무척 좋아했기에 만홧가게는 나의 단골집이었다. 기억도 못할 만큼 많은 만화를 보았다. 당시 유행하던 어린이 대상 월간 잡지도 구독했다. 거기에는 읽을거리와 만화가 함께 있었다. 걸핏하면 불량 만화를 추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어서 부모님도 만화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다. 때로 혼나면서도 틈이 나면 만홧가게로 갔다. 내가 왜 만화를 좋아했을까 되새겨 보면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면서 글 위주의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장면이 만화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읽는 부담도 덜했다. 지금이야 사진, 나아가 동영상이 넘쳐 다양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만화를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과 가 보지 못한 곳의 다양한 풍경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다. 문학 전집을 통한 것과는 다른 상상력이 나를 자극했다. 그래서 나는 만화도 어린 시절에 읽을 만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만화를 즐겨 본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수십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키운 감성과 지식, 상상력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이 됐다. 책과 친하기에 나이가 들어도 책을 읽는 데 두려움이 없다. 이제는 감성이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 다양해졌기에 독서만 고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용이 정제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들도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그렇지만 다른 재미에 독서가 밀리는 것을 볼 때는 많이 섭섭하여 가끔은 책을 읽으라고 채근하고 있다.

저자

조남호
1991년부터 국립국어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어문연구실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는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취미도 독서, 특기도 독서라고 말하고 있다.

자고(自古)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위인전을 읽어 보면 성장 과정에서 책을 많이 읽어 인생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풍부한 상상력을 계발시킨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에 이르게 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당연한 이치로, 책을 통해서 독자는 간접 경험을 쌓고,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도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습관이 그렇듯이 독서도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면 평생의 습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게 하고, 책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유산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부터 무던히 책을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었나 보다. 피난 시절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어느 날 읽고 싶었던 책을 여러 권 싸 들고 집 안의 외지고 구석진 방에 들어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재미있게 읽었던 일이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가족들은 내가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줄 알고 온 동네를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자 아이가 없어졌다며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구석방에서 엎드린 채 천연덕스럽게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나를 차마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냥 꼭 끌어안아 주셨다. 어머니는 요즈음도 가끔 당시의 이야기를 하시며 결국 책벌레가 책과 관련된 전공(?)에 평생 몸담게 된 것 아니냐며 웃으시곤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소녀 시절 『빨간머리 앤』이라는 동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을 당시 아동문학가였던 신지식 선생님께서 1962년 이화여고 주보인 「거울」에 처음 소개한 것을 출판사가 책으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앤 셜리라는 감성이 풍부한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는데 이 책은 이후에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주인공의 대학 시절, 신혼 초의 시절 등을 다룬 후속작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계속 인기를 누렸다. 당시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들과 돌려가며 보았는데 수업 시간에 교과서 속에 감추어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생각도 난다.
이후 사춘기를 지나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베르테르와 롯테의 애절한 사랑에 흠뻑 빠져 며칠 동안 슬프고 우울했던 기억, 대학 시절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며 인생을 논하고, 미래를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폈던 꿈 많던 시절 등이 지금 생각하면 다 책을 통한 고귀한 경험들이었다. 내가 교직을 꿈꾸게 된 것도 책 덕분이다. 당시 여성들의 선도자이셨던 김활란 박사님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큰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우리는 독서를 하며 풍부한 감수성을 키우게 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주변에 항상 한 권의 책이 있도록 준비하는 편이다. 여행 갈 때, 침대 머리에, 지하철을 탈 때, 미장원에 갈 때, 서재의 책상 위 등 내가 가는 곳, 있는 곳에는 항상 손닿는 곳에 책을 둔다. 그리고 책의 종류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준비해 놓는다. 여행 갈 때나 지하철 안에서는 부피가 작으면서 즐겁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침대 머리맡에는 내용은 좀 무거우나 깊이가 있는 책을 둔다. 문득 잠이 깨어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이런 책을 보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든다. 이럴 때 너무 재미있는 책을 읽다 보면 빠져들게 되어 밤을 새우며 읽게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같은 책은 이후의 전개 상황이 궁금해서 계속 읽다 보면 새벽이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추리소설은 잠자리에서보다는 아주 무료하게 느껴지는 날 편안한 자세로 붙들고 앉아 식사도 거른 채 몇 시간이고 읽으면서 책의 재미에 빠져드는 쪽이다.
나는 특히 새 책을 사서 읽을 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종이 특유의 냄새를 즐긴다. 상큼한 것 같으면서 약간 기름 냄새가 나는 듯한, 인쇄 작업 과정에서 묻어나는 냄새, 그것이 참 신선하게 느껴진다. 현란한 스마트폰의 화면과는 비할 수가 없는, 책만이 가지는 특유의 향기이다. 책은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시시때때로 다스릴 수 있게 해 주고, 감싸 주며, 우리의 내면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기묘한 마력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5년 국민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초·중·고교 학생들의 경우 ‘시간 부족’과 ‘독서 습관 미형성’,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 등의 정보/오락매체’ 등이 주된 독서 장애요인으로 나타났다. 또한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학교 아침독서 시행률은 2년 전 대비 17.3%나 낮아진 것으로 나타나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독서 습관 형성 및 독서율 향상을 위한 가정, 학교, 도서관 및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이 시급하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미래의 주인공인 아동, 청소년들이 책 읽는 분위기와 사회에서 성장해야 국가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의 골목도서관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상관없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면 책을 평생 벗 삼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골목도서관이다. 마땅한 장난감이나 놀이 없이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던 아이들은 하나둘 골목도서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후 오랫동안 골목도서관에는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공동체의 가장 중대한 범죄라 할 수 있는 전쟁이나 집단살해 등 반인도적 범죄를 다루는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지구촌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의 이미지가 참 잘 어울리네요. ”라며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놀라기도 한다. 어린이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기르는 일에 내가 평생 얼마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는지 안다면 더욱 놀랄까? 1993년까지 유니세프를 통해 선진국의 도움을 받던 한국이 1994년부터 유니세프를 통해 돕는 나라로 변신할 즈음 나는 유니세프의 역할과 필요성을 알리는 자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나는 한국 최초의 골목도서관을 만든 일이 늘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뜻밖에도 어린이도서관이 전국에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작은 밀알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1979년 논현동에 단독주택을 짓고 나서 그 골목의 어둑한 반지하 방에 세 들어 사는 가정의 아이들이 밤낮없이 골목에서 뛰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도 아닌 골목길에서 무방비 상태로 뛰노는 어린이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비교적 큼직하게 지은 우리 집 차고를 골목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실로 꾸몄다.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던 어린이들이 번갈아 드나들었다. 좀 더 많은 어린이가 모여들게 하려고 주변 학교의 독후감 숙제 일정과 도서목록을 구해서 어린이들 숙제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넉넉히 갖추었다. 일일이 손으로 쓴 대출기록을 보면서 책 3권을 읽은 어린이에게는 학용품을 상품으로 주며 격려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하고 독후감도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부모들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도서관학과 대학생들의 자원봉사를 유도해서 독서교실을 운영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화여대 김옥길 전 총장 이 와서 보고는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위인전 전질을 기증하 는 등 제법 인기 있는 도서실로 자리 잡았다.
㈜에스콰이어 창업주인 고 이인표 회장이 기업 차원에서 인표어 린이도서관이란 이름으로 어린이도서관 지원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내가 만든 골목도서실이 모델이다. 이 회장이 우리 집 골 목도서실을 보고 가더니 문화적?경제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어 린이들이 독서 습관을 기르며 꿈을 키울 수 있는 문화공간을 진 도, 구로, 태백, 부산 등 국내뿐 아니라 사할린, 알마티, 연길, 용 정 등 한민족이 모여 사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각지를 포함한 스무 곳에 세운 것이다. 이때 어린이 책뿐 아니라 다양한 시청각 자료 까지 갖춘 도서관과 놀이터를 만들고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가 스스로 도서관을 운영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도록 자문한 기쁨도 크다. 그 후 인구의 서울 집중과 저출산 추세까지 겹쳐서 어린이도서관 이용자가 크게 줄어드는 상황은 너무 아쉽다. 그럴 수록 어린이도서관은 지역사회 문화사랑방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도서관이야말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 과거와 현재 와 미래를 이어 주는 가장 보배로운 다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과 가까워지도록 은연중 이끌어 주신 부모님 덕분에 나는 헬렌 켈러나 조지 워싱턴 등의 위인전을 즐겨 읽으며 자랐다. 일단 목 표를 정하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내 이루고 마는 불굴의 투 지, 어느 경우든 정직이 최선이라는 믿음 또한 늘 즐겨 읽은 위인 전에서 얻은 배움이다. 『얄개전』 같은 명랑소설은 내게 읽는 재미 를 일깨워 준 책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우려될 정도로 스마트폰에 탐닉하는 요즘 우 리 어린이들이 책 읽는 재미에 빠지도록 하고 싶다. 세계적 문호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동시에 사망한 4월 23일을 ‘세계 책 의 날’로 정하고 부모들은 한 달 동안 자녀가 잠들기 전에 20분씩 책을 읽어 주는 캠페인을 한국에서도 좀 더 본격적으로 펼치면 어 떨까. 생일마다 책을 선물해서 뭐니 뭐니 해도 어린이에게 최고 의 선물은 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캠페인은?
어린이들이 책을 평생 벗 삼을 수 있도록 뜻있는 어른들이 마음을 모으는 꿈. 어린이를 위한 내 버킷리스트에 담겨 있다

송상현
1992년 유니세프법률가클럽 창설 멤버로 유니세프와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서울대학교 법 과대학 학장 및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역임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돌아보면 나에게 책은 장애라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조건을 극복하게 해 준 든든한 동아줄이다. 독서를 통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늘 책과 놀았다.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내 친구 였고, 책 속에 서술된 풍경을 통해 자연을 접했다. 책을 덮고 나 서도 난 그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곧잘 그들이 사는 동네 로 놀러가기도 했다. 작품의 결말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끝났지 만 그 지점에서 주인공의 스토리를 다시 이어 가는 것이 가장 즐 거운 놀이였다. 이런 이상 행동은 나의 장애에서 비롯됐다. 나는 돌 무렵 고열로 심하게 앓고 난 후 두 팔과 두 다리가 축 처져 제 기능을 하지 못 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가 너무 심한 나는 밖에 나가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무료 하게 보냈는데 한글을 익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심심 할 사이가 없었다. 그 당시는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서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외웠고 그 내용을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 었다. 엄마는 내 얘기를 들으며 “어쩜 그렇게 청산유수야, 말 잘 하면 사람들이 깔보지 못해. ”라며 칭찬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장애인 딸이 성장해서 사회에 나갔을 때 장애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을 가장 걱정하셨던 것 같다. 자기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하는 습관을 키워 주시려고 엄마는 다 아는 내용이지만 처 음 듣는 척하며 내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면서 자신감을 키워 주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최초 방송작가로, 방송 리포 터로, 방송 MC로 31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오로지 독서 덕분이다. 요즘 우리나라 독서 율이 1년에 1권도 안 된다는 보도를 보며 이 시대 청춘들이 아픈 이유가 어쩌면 독서 결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 사회의 ‘스펙 쌓기’ 위한 자격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폭넓은 경력이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따라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이 바로 성공적인 삶 의 시작이라고 본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하는 습관을 키우고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내용을 말로 표현하고, 글로 정리하며 생각을 확장해 나 가면 그것이 곧 지적재산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철학 서를 읽는 것이 그 지적재산을 불려 나가는 방법이다. 철학은 학 문의 기초이다. 모든 지식을 증명해 내는 데 사용되는 수학과 과 학도 철학적 사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철학 에세이는 알렉상드르 졸리앙의 『왜냐고 묻 지 않는 삶』이다. 졸리앙은 뇌성마비장애를 갖고 있는 프랑스 철 학자로 유럽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철학적 사고의 전 환을 위하여 3년 전부터 한국에 살고 있는데 한국 생활에서 느낀 소소한 일상을 이 책에 담았다. 한국 사람들은 왜냐고 물으며 불 안과 불행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나는 왜 ‘금수저’로 태 어나지 못했을까? 나는 왜 키가 작을까? 심지어 친절한 사람에게 는 친절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등 수없이 왜냐고 묻는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수없이 왜 내가 장애인이 되었는지를 물으며 살았으니 말이다. 졸리앙은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는 그대로이게 내버려 둔다. 판 단하지 않고, 왜냐고 묻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 그런데 우 리는 어떠한가! 아주 세밀하게 분류한 잣대로 비교하며 엄격하게 판단한다. 그 판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자꾸 왜냐고 물으며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한탄한다. 졸리앙은 이 것이 우리 인생을 아프게 하기 때문에 삶을 그대로 두고 그냥 받 아들이라고 조언한 것이다. 이런 소중한 조언들을 받을 수 있기 에 우리는 책을 통해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책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 책은 나를 늘 안전한 곳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그래서 책에 길 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 : 방귀희
•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KBS, EBS, BBS, 복지TV에서 방송작가로, MC로 31년 동안 일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 100호 발간 기록을 세웠고, 사회복지학 박사로 숭실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며 장애예술인을 위한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 저서로는 소설 『샴사랑』, 『한국장애인사』 등 30권이 있다.

내가 읽은 책 이야기

내가 읽은 책의 첫 기억은 <소년중앙>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서울 사는 큰 누나가 <소년중앙>을 달마다 보내주었다. 올 때가 되면 우체부가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보고 또 보고, 매번 열 번도 넘게 보았던 것 같다. 소시지 광고를 보면서, 그 때는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9남매 막내였던 내게 흔했던 것은 형과 누나들이 쓰던 교과서였다. 그 중에서도 <국어>는 학년과 관계없이 읽을거리가 많았다. 집에 있는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그 시절, 요즘으로 보면 선행학습을 한 셈이다.
여름에는 참외밭에 원두막 지키는 일이 많았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시간을 그나마 보낼 수 있게 해준 건 엿장수가 엿과 함께 가지고 다니던 만화였다. 다 본 만화 세 권을 두 권으로 바꿔보는 식이었다. 다시 세 권을 받으려면 열심히 빈 병과 비료포대를 모아야 했다.
읍내 중학교에 갔을 때, 도서관이 따로 있어서 정말 좋았다. 도서관에 장서가 만 오천권이나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교장선생님이 기억난다. <암굴왕> <장발장> <알프스 소녀 하이디> <왕자와 거지> <플란다스의 개> <해저 3만리>같은 책은 지금도 기억난다. 책 뒤에 꽂힌 대출카드에 내 이름이 적히는 게 좋았고, 대부분의 카드에 내 이름보다 먼저 이름을 올린 선배에게는 은근 경쟁심도 생겼었다.
서울서 우체국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둘째 형이 가져다 놓은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으로 방학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는 잘 모르고 그냥 읽었지만 명작이라 꼽히던 문학작품을 그 때 거의 모두 읽은 거였다.
대학은 형 둘이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던 터여서 고맙게도 4년 장학금을 보장해주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가기는 갔지만 마음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이때를 넘길 수 있게 해준 것이 <대망>과 <후대망>이었다. 그냥 도서관 서가 사이를 헤매다가 발견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어느새 한 학기가 지났고 마음도 정리되어 있었다. 도서관이 개가식으로 운영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당시 도서관이 개가식이었던 곳이 숭실대와 서강대뿐이었니 내게는 행운이랄 수 있다.
그리고 좀 있다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읽고 싶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1차 시험을 세 번, 2차 시험을 네 번 치르는 동안 같은 책을 적게는 두세 번, 많게는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일곱 여덟 번째 읽어도 자꾸 새로운 게 나오는 걸 보며, 한 번 읽고는 읽었다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만임을 알았다.
또 한 번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 유학시절이다. 일요일 성당에 다녀온 후부터 다음 금요일 오후까지, 그리고 아침에 아이 둘을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다준 다음부터 대학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늦게까지, 2년 동안 저작권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을 통독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로부터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덕을 보고 있으니 투자라면 참 좋은 투자를 한 셈이다.
돌아보면 책은 이렇게 내가 세상을 알아가고, 버티고, 그리고 열어가는 힘을 주었다. 내 인생에서 이 부분을 빼면 뭐가 남을 것인가는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저자 임원선 (국립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