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든 영화든 시리즈물은 나와 애증관계에 있다. 시리즈물을 즐겨보면서도 싫어하는 이유는 책을 다 읽은 후 다음 편을 기다려야 하는 의무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는 마음의 절정은 전편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최고조였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동은 맥주의 거품처럼 사그라진다.
시간이 흘러 다음 권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또 다시 전편을 뒤적여 등장인물과 줄거리부터 머릿속에 정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가장 거북해서다. 재미있는 소설은 빛의 속도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만 의무감을 안고 읽어야 하는 책은 한 장을 넘기기도 버겁다.
이 불 같은 책 읽기 성향의 명암 때문에 세월아 네월아 시간이 다 가도록 읽지 않은 책이 꽤 있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책은 쌓아놓고 읽지 않고, 도서관 반납기한이 다 되도록 읽지 않고, 빌려준 친구가 엄포를 놓아도 읽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책을 꼽으라면 단연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이다.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장장 8년 동안 6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끝내 다 읽지 못했던 책이며 무엇보다 내 것이 아닌 책이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여행길에 들고 왔다가 그 무겁고 버거운 존재감 때문에 우리 집에 버리다시피 두고 떠나버린 것인데 남겨진 그 책이 버겁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읽지 않은 책을 거꾸로 꽂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언젠가 읽어야 하는 숙제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한 조그마한 장치였는데 그 거꾸로 자세가 신경 쓰여 어느 날부터는 포스트잇을 붙여두기 시작했다. 노랑, 주황, 연두 색색의 형광 포스트잇들이 내게 말했다.
이쯤에서 나를 읽는 게 어때?
볼 때마다 마음에 각성을 일으키던 그 형광 포스트잇들은 또 한 번의 이사와 함께 우수수 떨어져나가고 미답의 책들은 수많은 책 속에 묻혀버렸다.
눈앞에서 숙제가 사라져버린 듯 느껴지자 나는 또 다시 쉽게 손이 가는 말랑한 소설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권으로 불어버린 ‘소유의 종말’을 발견하고 말았다. 한 권은 친구가 준 내 것이고 또 한 권은 결혼과 함께 합쳐진 남편의 것이었다. 이제 진짜 두 배의 중압감이 느껴진다. 책 읽기의 종말이 있다면 ‘소유의 종말’을 읽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읽으면 내가 가진 모든 책을 다 읽은 거와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왜 네가 부담스러울까?
그것은 책의 이미지가 주는 표상과 각인 때문이었다. 거꾸로 혹은 포스트잇을 붙인 거북스러움의 표상은 시리즈물을 버금가는 중압감으로 기억된 셈이다.
결국 나는 책에게 부여한 이미지를 바꾸기로 했다.
8년의 독서, 8년에 걸쳐 읽고 있는 책이니 까짓것 천천히 읽자. 책이 늙는 것도 아니고 급할 거 없잖아. 빨리 자라라고 아이의 등을 떠밀 수 없듯이 책 읽기도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되지. 변덕이 나를 부를 때마다 놓아버렸다가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다시 읽으면 되는 거지.
나는 읊조리듯 결심했다.
해치우듯 읽고, 숙제하듯 읽었던 책들에 대한 반성을 겸하며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읽다 보면 작가가 글을 쓰던 그 순간의 속도와 흡사해질 것이라고 반성 아닌 반성을 하면서.
8년을 장처럼 묵혔던 책이 느리게 읽는 책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덮고 읽고 덮고 읽고를 반복하다 보니 그 사이에 생각이 끼어들었다. 생각을 위해 스스로 책을 덮고 시간을 갖는 사이, 느리게 읽는다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고로 독서의 계절이니, 나는 느리게 읽을 책을 권한다. 이왕이면 그대의 책꽂이 어딘가에 중압감으로 꽂혀있을 책 한 권으로.

추정경
• 소설가. 방송작가
•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라디오, TV의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도 줄곧 소설쓰기를 꿈꿔왔다. 2010년 첫 장편소설 <내 이름은 망고>로 청소년문학의 미답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과 함께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폭력이라는 묵직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염두에 둔 <벙커>를 발표하며 한국문학의 차세대 작가로 발돋움했다. 강연, 작가와의 만남 등을 통해 청소년과 교감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한 성장소설을 쓰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다.
• 저서 :『벙커』 (다산북스, 2013) 『내 이름은 망고』 (창비, 2011)

‘새벽’을 읽는 법


유리 슐레비츠가 쓰고 그린 ‘새벽’이란 그림책이 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난 아침 일찍 소형차를 몰고 출근했다. 대개 여섯 시 전후였다. 여름엔 환했고, 겨울엔 캄캄했고, 봄과 가을엔 어둑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면 충분했다. 강변을 끼고 달리는 길은 한적했고, 회사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비어 있어 잠이 덜 깬 이 같기는 사무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여 나는 늘 사무실을 깨우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행여 나를 일에 미친 사람으로 오해는 하지 마시길. 일찌감치 사무실에 나온 내가 ‘일’이라 불릴 만한 무언가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난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기도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하고, 정 심심하면 몇 문장 끼적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다른 이들이 도착했다. 컴퓨터 자판 치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기 벨이 울리면 기지개를 켰다. 그건 이제 일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보다 문어적으로 말하자면 사무실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사무실에서의 하루가 어떠한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무실에 자리 붙이고 앉아 있어본 경험이 있는 이나 없는 이나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일 테니. 밤이 깊어야 그 사무실에서 나올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 테니. (그래도 그 일상이 궁금하다면 김기택의 ‘사무원’이란 시집을 추천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날이 되면 또 다시 집에서 나와 회사로 향해야 한다는 것도 사족보다 더 쓸데없는 문장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도 난 아침 일찍 소형차를 몰고 출근했다. 가벼운 클래식과 월드 뮤직으로 구성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강변을 낀 도로에 들어섰다. 옅은 안개가 나를 맞았다. 아침이 되면 곧 사라질 이슬비 같은 안개였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특별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안개는 앞 유리를 조금씩 적셨다. 그래서 와이퍼를 작동시키는데 무언가가 내 가슴을 때렸다. 무언가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일상에 찌든 내 맷집으로는 충분히 견딜 만한 타격이었다. 무시해도 될 만한 어쭙잖은 타격이었다. 그러나 난 그날 그 타격에 항복하기로 했다. 강변을 낀 도로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원에 차를 세웠다. 몇 년 동안 무심히 지나가기만 하던 공원이었다. 내가 차를 세우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공원이었다. 나는 그 공원에 차를 세우고 팔각정에 올라가 안개 낀 강을 보았다. 늘 보던 강을 새삼 보고 또 보았다. 안개는 내가 느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사라졌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던 안개가 어느 순간 다 사라지고 세상이 밝아졌다. 새벽이 지나가고 아침이 온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길에서 아침을 맞은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서두르면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판 치는 소리와 벨 울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 없으면 회사는 어떻게 될까, 하는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사무실을 깨우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므로. 사무실은 그가 누구인지는 개의치 않을 것이므로. 그리하여 긴 세월이 지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난 아침 일찍 일어난다. 아니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맞는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침 정말로 팔각정 안에서 안개가 걷히는 걸 보았느냐고. 그런 이에게 난 이렇게 답하겠다.

유리 슐레비츠가 쓰고 그린 ‘새벽’이란 그림책이 있다.

설흔 (소설가)
•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선인들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이 생각하고 열망했던 것들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연하여 오늘날의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고전 속 인물,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문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통해 당대 문인들의 글을 널리 읽히게 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풀어낸『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로 탁월한 상상력과 생생한 인물묘사에 호평을 받으며 2010년 제1회 창비 청소년도서상 대상, 2011년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청소년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 저서 : 『우정 지속의 법칙』(창비, 2014) 『내 아버지 김홍도』 (낮은산, 2014)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창비, 2011)

남편과의 사랑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람에게선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그 흔한 화장품 하나 바르지 않아도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아마도 그건 은은한 비누향기와 가을햇살의 냄새를 닮은 종이냄새가 블렌딩되어 나는 향기였을 것이다. 11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던 건 책이라는 ‘오작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에요?”
“한 번 읽어봐. 10권짜리 책이긴 한데 재미있을 거야.”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전에 내밀었던 건 바로 <태백산맥> 1권이었다. 그 때까지 내게 책이란 수능을 위해 공부해야 했던 도서목록 뿐이었다. 읽어봤자 겨우 고전 몇 권, 그것도 아니면 참고서에 있는 요약본 정도였다. 그런 내게 대하소설 1권은 보기 전부터 덜컥 겁이 나게 만들었다.
“얼마나 빨리 2권을 빌려달라고 하는지 봐야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아직 사랑 고백을 받진 않았지만 그 사람의 손길, 말투, 온기 모든 것이 싫지 않던 때였다. 미치도록 가슴이 뛰었던 건 아니지만 혼자 있으면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났고, 그 사람과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곤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난 짧은 시간에 1권을 다 읽었고, 그는 2권을 빌려준다는 핑계로 자연스레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열 권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그는 나와 만날 수 있는 열 장의 티켓을 손에 쥐었고, 나 또한 그를 빨리 보고픈 마음에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나갔다. 이처럼 쉬우면서 센스 있는 애프터가 또 어디 있을까? 아마도 책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11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만나면 할 얘기들이 참 많았다. 대하소설의 특징인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눴고 책 이야기는 자연스레 삶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여행은 어디로 다녀왔는지,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등등 얘기하다 보면 매번 막차를 타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시작으로 공감대를 점점 넓혀가며 나이라는 장벽을 허물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
그 후로도 책은 항상 내 곁에 있다.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으며 이 사람이야말로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걸 깨달았다. 리영희의 대담집 <대화>를 보면서 언론인의 사명을 잃지 않는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고, 신영복의 <강의>는 가장 활발히 방송을 하던 때 겪었던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뿐이 아니다. 종종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내게 물어온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하나요? 가장 필요한 게 뭔가요?”
여기에 대한 나의 답은 일관되게 독서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에 책이 큰 공헌을 했듯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 아나운서가 된 이후에도 책은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고, 위로하고,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창 방송을 많이 했을 땐 멘트 하나하나가 윤활하게 굴러갈 수 있었고,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공백기 땐 방송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 대신 그 안에서 또 다른 즐거움과 지혜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곧 복귀를 앞둔 십 년 차 아나운서로서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삼으며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지 많은 힌트를 얻고 있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은 똑같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려나가는 그림은 각양각색이다. 화려한 그림을 그리든 담백한 그림을 그리든 그건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않고 혹은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멋있는 그림을 부러워하고만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부러워하는 동안 아까운 시간은 여지없이 지워지고, 그 누군가는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에 또 하나의 획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고민정(아나운서)
• KBS 아나운서. 경희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2004년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그동안 <무한지대 큐>, <책읽는 밤>, <국악한마당>, <생로병사의 비밀>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9년 중국유학 중에는 1년간 칭다오 대학에서 한국어과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복귀 후 TV와 라디오를 통해 <국악한마당>, <국악의 향기>를 진행하고 있다. 자신에게 있어 책이 너무 큰 존재라 말하는 그녀는, ‘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픈 마음이다. 아나운서 이외에도 꾸준한 집필활동으로 에세이와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저서 :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행복한책장, 2010)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마음의숲, 2013)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반비, 2014)

안녕하세요, 저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윤덕원입니다.

무대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면 가끔 팬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기곤 합니다. 제가 만든 노래에 위로를 받았다,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저에게 가사를 잘 쓰는 비결에 대해 물으시곤 하는데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노래를 만드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참 기쁘고 뿌듯합니다. 제가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데 어쩌면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들이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유독 책을 좋아했습니다. 봤던 책을 보고, 또 보고. 친구네 놀러가거나 어딘가에 갈 때면 종종 그곳에 있는 책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곤 했습니다. 집에 있는 아버지 책들도 막 꺼내다 읽고… 그때는 제가 책을 많이 읽어서 스스로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환상을 깨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교실 뒤에는 ＇학급문고＇라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책을 갖다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문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곳에 있던 에히리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꺼냈는데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건 이 책이 이상한거다＇ 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는데, 대학에 가서 비로소 깨달았어요. ‘아. 내가 어려운 책을 잘 이해 못하는구나’ 라고 말이죠. 많은 대학 교재들이 너무 어려워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때는 점점 책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노래를 만들면서 가사도 쓰게 되었는데, 노래를 듣는 순간 바로 이해될 수 있도록 아주 쉬운 말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쓴 가사들을 좋게 들었다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생기기도 하고, 저도 더 열심히 쓰려고 하다 보니까 문득 ＇쉬운 책과 쉬운 글에서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내가 괜히 내 능력보다 어려운 것들을 아는 척 하려다 독서의 즐거움을 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독서의 즐거움 그 자체를 느끼기 위해 제가 좋아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찾아 열심히 읽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참 어려운 책을 만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는 굳이 무리해서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엔 좋은 책들이 참 많으니까요.

청소년 여러분!
세상엔 좋은 책들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해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대학에 가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지 하는 딱딱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 책, 나를 꿈꾸고 상상하게 하는 책, 쉬운 말들로 나를 위로하는 책들을 편하게 읽으면서 독서의 참 즐거움 자체를 충분히 느끼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책 읽기의 즐거움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테니까요. 제가 이렇게 노래를 계속 만들 수 있는 것처럼요.

• 윤덕원 (가수, ‘브로콜리 너마저’ 보컬, 베이스)
•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군 제대 후 친구들과 함께 그룹 ‘브로콜리 너마저’를 결성해 2007년 미니앨범 [앵콜금지요청]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의 리더이자 청일점으로 베이스와 보컬을 맡고 있으며 2008년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2010년과 2011년 제 7,8회 한국대중음악상 모던록 노래부문 최우수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감성이 묻어나는 모던록 노래로 청춘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표 밴드로 손꼽힌다. 올 6월에는 싱어송라이터로 첫 번째 정규 솔로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음악적으로 가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는 자신만의 감성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좋은 말과 글을 찾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좋은 노래와 가사를 만들고 다른 뮤지션의 음반 제작도 기획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작업을 하는 것이 목표이다.

며칠 전 한 컷의 스마트폰 사진이 인터넷에서 뜨겁고도 즐거운 화제가 되었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천진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소년의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소년의 표정도 사랑스러웠지만 사실 화제가 된 것은 소년 뒤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네 아저씨’ 둘 때문이었다. 사진 찍히는 줄 모르고 편안하게 수다 떠는 듯한 그 아저씨들은 워렌 버핏과 폴 매카트니였다. 어머나, 이 두 사람의 조합을 한국식으로 해석하자면 삼성 이건희 회장과 조용필 가수가 동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상황을 상상하면 된다는 댓글도 유머러스하였다.
기업인이며 투자가인 워렌 버핏은 10대에 아르바이트로 모은 1만 달러를 주식에 투자하면서 일찍이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빌 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워렌 버핏은 현재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게 활동하며 전 세계 뉴스를 장식한다. 그가 돈만 잘 버는 기업가였다면 세계인들이 이토록 추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속했으며, 이미 많은 기부를 해왔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기업인인 워렌 버핏은 ‘현인’이라 불린다. 기업가 누구나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워렌 버핏과 점심’이라는 이벤트 상품은 몇 십억이라는 가격으로 경매에 부쳐지기도 한다.
비틀즈라는 세기적 록 밴드 출신인 폴 매카트니도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중음악가’로 기록되어 있다.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비틀즈의 노래는 우리 귓가에 수시로 닿고 가슴을 뛰게 한다. 멤버 중에 이미 세상을 떠난 뮤지션도 있지만 폴 매카트니는 칠십이 넘어선 오늘도 음악을 한다. 더구나 음악뿐만 아니라 동물보호, 지뢰반대 활동 등에 앞장서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위대한 두 사람의 자연스럽고 소탈한 모습이 한 컷에 담겼으니 볼 만하지 않겠는가. 나는 책을 만드는 출판인으로서 이 사진 속 소년에게 뭔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위대한 인물과 함께 사진 찍힌 행운을 가진 소년이 실제로 그 인물과 대화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대화라고? 가능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하자고, 시간을 내달라고 조를 필요가 없다. 그들이 쓴, 혹은 그들이 직접 말로 푼 책을 읽으면 된다. 수십 억을 내면서까지 워렌 버핏과 점심을 먹는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이야 특수한 경우지만, 워렌 버핏의 인생과 성공, 행복과 삶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면 그의 책만 펼쳐 들면 된다.
폴 매카트니의 세상에 대한 생각, 뮤지션으로서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비틀즈 앤솔로지>라는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얼마 전 나는 스팅이라는 뮤지션이 우울한 소년 시절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기까지의 성장담을 직접 쓴 책을 만들기도 했다. <스팅> 책을 만드는 동안 나는 그와 친해진 듯했다. 그가 나만을 위해서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책이란 가장 잘 정리된 한 사람의 깊은 생각의 집이자 논리가 생생한 실생활 교과서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책을 펼치면, 그 성공한 인물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위대한 인물과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독서다.
우리 모두는 각자 미래의 삶이 행복하기를,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우고 깨우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미래가 나의 것이므로.

정은숙 (<마음산책> 출판사 대표)
• 전주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편집자로 출판계에 입문했다.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후 그 동안 시집과 책, 출판에 관한 저서들을 발표해왔다. 세계사 편집장, 열림원 주간을 거쳐 2000년에는 출판사 <마음산책>을 창업했고 하이브리드 양식의 문예출판을 시도하여 독서시장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홍보 상무, 한국출판인회의 대외협력위원장을 거쳐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원장을 맡아 출판인들을 양성했다. 책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이야말로 책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 저서 :『편집자로 산다는 것』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2) 『책 사용법』 (마음산책, 2010)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 『비밀을 사랑한 이유』(민음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