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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유리알 유희
현대문학 | 2014-06-30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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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UB | 웅진북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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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11. 유리알 유희 헤세는 히틀러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11년을 를 집필하면서 견뎌냈다고 라는 에세이에서 짧게 언급했다. 반전 평화주의자였던 헤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가 독일의 언론과 동포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고 지식인들의 전쟁 선동과 대중들의 전쟁에 대한 열광에 충격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의 이력서에 11년의 시간을 한 줄로 정리한 그 말의 무게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는 헤세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장편소설이다. 헤세의 모든 문학적 기도가 총결산된 대표작으로 평가되며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앞서 발표했던 그의 중기 이후 작품들인 , , 의 모티프가 새로운 이야기 구조 속에 결합되어 있으며 헤세의 삶과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도원 기숙사 학교의 체험도 짙게 반영되어 있다. 는 일반적인 장편소설의 단선적인 내러티브 구조와는 달리 유리알 유희에 대한 개론부터 중심인물인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그가 남긴 유고 등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화자도 일정치 않고 개론서와 연대기적인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시들로 이루어진 구조는 유기적이라기보다는 파편적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크네히트의 전기는 헤세 자신의 고백적 성격이 강한데 이런 성격의 글이 지닐 수 있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헤세는 다양한 형식의 글을 편집해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한 인물과 시대를 다채로운 관점에서 보여 주고 있다. 는 25세기에서 바라본 20세기를 그린 미래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헤세가 바라본 동시대의 문제점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 소설로서 를 바라볼 수도 있는데 작품 속의 주 무대인 카스탈리아는 모든 학문과 예술과 정신 수련을 종합해서 연구하는 일종의 교육 유토피아로서 헤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슈바벤 지방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역시 , , 같은 헤세의 다른 성장소설들처럼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3단계로 도식화할 수 있다. 죄와 더러움을 모르는 순진한 자연, 또는 낙원의 상태인 1단계에서, 죄악을 통해 선악을 아는 단계로 정의와 선에 도달할 수 없는 절망의 2단계를 거쳐, 도덕이나 법률을 넘어서서 신앙으로 자비와 구원의 3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화는 소설의 중심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에도 부합하고 크네히트의 유고에 붙은 탁월한 3편의 단편은 그런 도식화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걸작들이라 할 수 있다. 헤세는 에 대한 자평에서 나의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표현했다. 이성과 양식이 사라지고 전쟁으로 치닫는 세상을 보며 헤세는 서양 문명의 한계와 인간성 상실의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한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고 오히려 전쟁 선동에 앞장서는 지식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미 노년에 달한 나이였고 고향에 은거하며 소설 창작보다는 수채화에 몰두하던 시기였지만 파괴를 향해 치닫는 시대의 위기를 보며 헤세는 조용히 자신의 문학적 총결산으로 자리 잡을 소설을 무려 11년간이나 써나갔다. 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으며 그해 노벨상 위원회는 를 특별히 언급하며 헤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 ■ 줄거리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는 맨 처음 유리알 유희에 대한 긴 개론으로 시작한다. 유리알 유희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그것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정신문화 타락의 실체가 설명되고, 잡문 시대라고 규정된 그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유리알 유희 교단이 자연스럽게 조직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최고의 학술과 예술 보존 기관이자 정신 수련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는 한 사람의 전설적인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를 기억하는데 그의 삶은 제자의 기록을 토대로 다음 장에서 전기적으로 기술된다. 소설의 본문에 해당하는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는 연대기 순으로 총 12장으로 펼쳐진다. 초반의 5장은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 명인에 오르기 전까지의 수업 시대를 중반의 2장은 명인 재임기를 후반 5장은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 교단인 카스탈리엔에 대한 회의로 번민하다가 그것을 비판하고 카스탈리엔을 나와 속세로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라틴어 학교의 뛰어난 학생 요제프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 음악 명인의 눈에 띄어 영재 학교에 추천을 받는다.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크네히트는 명인과 영적인 교류를 시작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체험한다. 영재 교육을 받으면서 서서히 자신의 성장을 자각하고 새로운 세계와 조화와 긴장의 관계에 들어간다. 크네히트가 그곳에서 만난 일반 청강생 데시뇨리와 수도원에서 파견되어 만난 야코부스 신부와의 대화는 그의 영혼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데시뇨리와의 만남은 요제프가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야코부스 신부는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정신의 추구로부터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에 눈뜨게 만든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각성과 그로 인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그를 위계의 최고 자리인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 임명한다. 크네히트는 그의 직무 수행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지만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인 공동체 역시 역사의 산물로서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결코 완전한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미래에도 정신적 이상향으로 남을 카스탈리엔이 아님을 깨닫고 교단에 명인 퇴임 신청을 한다. 카스탈리엔이 절대적인 이상향이 아님을 깨닫고 그의 그의 유일한 희망은 가급적 나이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정하고 교단을 떠나 친구 데시뇨리의 아들 티토의 가정교사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교단을 떠난 지 이틀 만에 티토와 수영을 하러 갔다가 익사하고 만다. 이어지는 대목은 크네히트가 남긴 유고이다. 세 편의 독립적인 단편과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원시 사회와 고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단편은 헤세가 말한 개인의 인생 발전 3단계 - 순진한 낙원의 단계, 신앙을 통한 자비와 구원 -와 겹쳐 놓고 볼 수 있다. 단편으로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세 편의 이야기는 헤세가 이전의 소설들을 통해 구축해 왔던 헤세 문학세계의 깔끔한 종지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사 『유리알 유희』는 나의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는 그의 사고가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선된 심리학적 연구를 마술의 경지까지 압축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음악적이며 명상적인 어조에서 괴테의 만년의 작품(『빌헬름 마이스터』)과 같은 수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그프리트 운젤트 헤르만 헤세는 - 정보시대의 예언자이다. 80년대가 지나고 나서야 독자들은 헤르만 헤세가 1934년과 1942년에 사이에 생각해낸 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 지그프리트 운젤트 『유리알 유희』는 잡문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특히 시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교육적 모델로서, 여러 가지 전문 영역에 걸친 정보 처리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으로서 읽힐 수 있다. - 폴커 미헬스 ■ 본문에서 문학적 예언자들은 문화의 파멸에 관한 이론에 여러 가지 용이한 공격 포인트를 제공했다. 특히 위협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투쟁을 감행하는 자는 시민들의 주목을 받으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사람들이 어제까지도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문화, 그에 대해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문화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으며, 시민들이 사랑하던 교양, 시민들이 사랑하던 예술은 더 이상 순수한 교양이 아니며 순수한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치 갑작스러운 돈의 인플레와 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자본이 위협받는 것처럼 적잖이 파렴치하고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몰락의 분위기에 반대하는 냉소적인 태도도 존재했다. 그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춤이나 추러 다니고,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을 유행에 뒤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예술, 학문, 언어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에 대해 감상적인 글들을 써댔다. 그리고 자신들이 종이 위에 구축한 문예물의 세계에서 어떤 자살자의 쾌감을 느끼며 정신의 완전한 타락과 개념들의 인플레이션을 확인했다. 그리고 냉소적인 무관심이나 취한 듯한 황홀함으로 예술, 정신, 관습, 성실성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과 세계의 몰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선한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악한 사람들 사이에는 음흉한 비관주의가 만연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교훈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서로 모순되고, 모든 것이 비껴 지나가고 어디에도 확실한 건 존재하지 않네요. 모든 것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어요. 우리는 세계사 전체를 발전과 진보로 증명할 수도 잇지만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몰락과 무의미함을 볼 수도 있어요. 도대체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진실하면서 보편타당한 교훈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얘야, 진리는 존재한단다. 그러나 네가 갈망하는 교훈, 절대적이며 완전하고, 분별력을 갖게 만드는 그런 교훈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너는 절대로 완전한 교훈을 동경해서는 안 되고 대신 너 자신의 완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네 안에 있는 신성, 그것은 개념과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란다. 진리는 체험하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야. 요제프 크네히트, 싸울 각오를 해라,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정신적 삶이든 육체적 삶이든 삶 전체는 역동적인 현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거기서 근본적으로 단지 미학적인 면을 파악하는데, 그것도 주로 리듬감 있는 과정의 이미지로 파악한다. 세계사는 지배자와 지도자, 권력자, 명령을 내리는 자들의 끝없는 대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처음에는 아름답게 시작하지만 추하게 끝을 맺는다. 그들 모두 적어도 겉보기에는 선한 동기로 권력을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권력에 사로잡혀 맹목적이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랑하게 된다. 그의 길은 그렇게 원을 그리며, 아니면 타원이나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갔다. 직선이 아니었다. 직선은 기하학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이나 사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와 당시의 각성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후에도 그 시에서 느낀 자기 경고와 용기를 성실히 따랐다. 물론 완전하게 할 수도 없었고, 주저나 의심, 변덕과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한 단계 한 단계, 한 공간 한 공간 용감하게 정신을 집중하여 그럭저럭 건너왔다. 크네히트는 탐색하는 정신적인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인간의 희망과 어리석음을 교만 없이 마주 대해야 하지만 그것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 현자와 사기꾼, 신부와 마법사, 도움을 주는 형제와 사기 치는 부당 이득자는 단지 한 걸음 차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담보 없이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협잡꾼에게 이용당하고, 사기꾼에게 돈을 지불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인간이 약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한 존재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인간 자신이 이런 나쁜 특성과 충동에 얼마나 깊이 참여하고 있는지도 간파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정신이며 사랑이고, 인간의 내면에는 본능을 거역하고 본능이 순화되기를 갈망하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음을 믿고 그것으로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그는 물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아 버린 후 그것을 이끼 위에 던졌다. 그리고 풀밭 위에 앉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꿈은 이제 싫증이 났다. 한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며 피를 멈추게 하다가 갑자기 마야가 되어 버리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체험과, 기쁨이나 고통으로 엮어 낸 이런 악마적인 것에는 너무 지쳤고 이 모든 것에 질렸다. 그는 여자도 아이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왕좌도, 승리도, 복수도, 행복도, 지혜도, 권력도, 덕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평온과 종말만을 원했다. 그는 이처럼 영원히 돌아가는 바퀴 같은 것을, 이런 끝없는 그림 관람을 멈추게 하고 소멸시키는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고 소멸시키기를 원했다. 죽음이란 아마도 휴식, 짧고도 작은 휴식이며 잠깐 심호흡을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다음에도 다시 계속되었다. 우리는 다시 거칠고 도취적이며 절망적인 인생의 춤 속에 들어 있는 수천 가지 형상 중 하나였다. 아, 소멸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끝 또한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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